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신라구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신라해적이 노리는 [[대마도]]의 보물=== 예나 지금이나 [[대마도]]는 척박한 땅이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보면 대마도는 ‘토지는 산세가 매우 험하고 깊은 숲이 많다. 전부 1000여 호가 사는데, 좋은 밭이 없어 해산물을 먹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면서 양식을 바꾸어 온다’라고 쓰여 있다. 현재 역시 대마도는 농지가 전체 면적의 4%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포로로 잡힌 현춘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얻고자 대마도를 습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마도는 산세가 험난해 곡식 재배가 어려운 지역이다. 그렇다면 신라해적은 무엇 때문에 대마도를 침공했을까? 대마도는 농경에 불리한 지형이지만 고대에는 은과 진주가 많이 나는 지역이었다. 또한 삼림이 우거진 대마도는 삼나무와 같은 목재가 풍부하게 자라는 섬으로 이는 주요한 조선용 자재로 쓰였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일본 조정에서는 일찍이 대마도 방위에 신경을 집중해왔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에서 은이 발견된 것은 674년 7세기 후반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은이 발견된 사례다. 이후 10세기까지 대마도의 은 채굴은 매우 활발했다. 신라해적이 상륙한 곳은 고대 은광산이 있던 ‘금전산’과 아주 가까운 곳으로 여기는 6세기말 일본 최초로 금까지 발견돼 조정에 바쳤던 곳이다. 일본은 이를 기념해 연호까지 대보로 바꿀 정도였고, 이 지역의 은광은 중세까지 운영, 20세기 초까지 아연을 캤다. 일본은 8세기 초 대마도의 은으로 은전을 만들어 당나라와의 무역용 화폐로 사용했다. 이 은전은 에도시대까지 유통됐다. 이처럼 대마도에서 금, 은, 구리 등이 채굴되고 있을 때, 신라의 사정은 매우 달랐다. 9세기 신라는 발해와의 교역이 끊어져서 금, 은이나 중국에서 수입된 견직물이 부족했고, 이 시기 신라는 금과 은이 부족해 왕이 사적인 사용을 금하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으로 신라해적이 노렸던 것은 금과 은, 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해적이 노린 것은 지하자원만이 아니었다. 대마도는 물이 맑고 잔잔해 예로부터 광택 좋은 천연 진주가 많이 났다. 신라해적이 노렸던 것이 또 있다. 목화가 들어오기 전, 솜을 대신한 견면이 바로 그것. 누에에서 뽑은 섬유를 뭉쳐서 섬을 만든 것이 견면인데, 이 역시 대마도와 큐슈의 특산품이었다. 견면은 이불과 겨울옷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일본은 신라에서 수입한 물건에 대한 결제를 견면으로 했는데, 화폐 기능을 했던 견면은 신라해적의 주요 목표일 수밖에 없었다. 894년 9월, 대마도를 침공했던 신라해적은 대마도 특산품인 금, 은, 동과 견면을 탈취해 갔던 것이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