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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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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적 == 사실상 모든 분야에 관여를 하셨다. 이 분 덕분에 당시 조선의 문화와 경제 수준이 몇 단계는 올라갔고, 조선왕조가 중간에 큰 전쟁을 겪고 정치적인 병폐를 겪어도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어찌보면 이 사람이 국가의 기초를 잘 닦아둔 덕택이다. 어떤 사람은 기초는 세종 시절에 전부 완성되고 남은 500년은 그 내용을 재구성하거나 반복했을 뿐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글처럼 이미 나라가 바뀐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업적이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성군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비판도 좀 있다. 물론 좋은 점이 너무 많아서 거의 묻히기는 하지만. '''-아래부터의 내용은 세종의 [[긍정]]적인 업적을 다룹니다-''' 문자 - '''한글을 새로 만들어내셨다!''' 덕분에 [[한자]]를 안 써도 된다. 빌어쳐먹을 [[한자]]를 안 써도 되게 한 건 정말 고맙다. 그 외에도 여러 [[일]]을 했지만 우리에게는 이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냐. 이거 하나만으로도 아래에 나오는 각종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위인에 등극하신 거다. ㄴ게다가 특허도 안 내셨다! 이 얼마나 고맙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ㄴㄴ 일국 만민이 써야할 문자에 특허를 내기도 하냐? ㄴㄴ 다 둘째치더라도 그 시대에 법적인 특허따윈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칭송받는다. [[국뽕|나라 마약]] 들이킨게 아니라, 몇몇 유명한 언어학자들 중에서도 [[한글]]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글]]을 찬양하기 바쁘다. 매우 지옥이었던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 가운데 가장 조선을 나쁘게 본 인물조차 '매우 쉬워 10살 이내에 깨우칠 수 있는 유용한 글자가 있다'고 공통적으로 수기에 언급한다. 그리고 이걸 활용 안하고 [[한자]]를 찬양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덤. 하나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의 제자 중 하나인 제임스 맥콜리는 [[한글날]]을 "전 세계인이 경축해야 하는 날" 이라고 할 지경이다. 한글이 만들어진 배경도 참 성은이 망극한데 백성이 글을 몰라 못 배워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을 못하고 억울함을 하소연 할 방법이 없으니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창제하여 이들이 배우고 억울함을 상소문을 통해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한글은 세종 혼자 만든 것이다. (사실 [[문종]]과 [[세조]]안평대군등 자녀들도 일부 참여했다고 한다. 다만 딸내미들도 참여햇다고 하는 건 공주들이 시집간 가문에서 주작질햇다는 것이 통설. 그래도 거의 대부분은 분명 세종의 독자적 창안이 맞다.) 한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알려진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작업할 때 즈음에는 [[급식충|서당의 밥을 축내는 벌레]]이었다. <ref>안그래도 대신들이 글자따위 만들어 뭐하냐, 백성들이 뭐 다글타며 까는 찰나에 최만리가 한글창제를 반대하는 상소까지 올리자 세종은 완전히 빡치기에 이른다. 그래서 '너 글자가 뭔지는 알기나 하냐?? 내가 지금 눈도 안보이는데 이정도 해놨고 그럼 좀 짜져. 그리고 이런 문자 나 아님 누가 만드냐??'하고 극악하게 까버리셨다. 원래 그런 분은 아닌데 건강도 안좋은 마당에 언어학자로서의 자부심까지 곁들여져 확~~ 하심;; (잘하셨어요ㅋㅋ<>) 그리고 중국을 건드리기 껄끄럽다는 것도 한 몫 한 거 같다. 중국말 안쓰니 오랑캐 어쩌고 하는 소리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했다 .</ref> 다만 훈민정음 만들 때 말단으로 들어간 것이 와전된 것이다. 애초에 왕이 시켜서 만든다면 기간에 급급해 열화되지, 이렇게 완성도 높은 글자가 나올 수 없다.<ref>요즘 말로 치면 책 서문이나 써보라고 하신거다.</ref>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뭐 여러가지가 잇을 것이다. 우리 세종니뮤가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이 여겨서 ㅠ.ㅜ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르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종모법을 만들고 북방에 간 무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생을 같이 보내는 제도를 만들어? 종모법으로 인해 기생 어머니의 딸도 기생이 되는 법을 만든게 세종이야 종모법으로 노비의 수가 확 늘어나게 된다. 백성을 사랑해? ㄴ세종실록 그냥 자면서 눈으로만 훑어봐도 이 말은 개소린데..ㅋ 사실 북방에 간 기생(을 보냈는지조차 기록이 몇장 없어서 사신이 사냥가면 딸려보낸 정도일걸???)이 고생이냐 북방까지 가면서 오만 물품을 수송하고 사냥하면 몰이하고 했던 남성노비가 고생이냐? 그리고 기생이라고 말해서 그렇지 일명 관기, 관노비다. 이 여성들의 직업 자체가 음악과 춤을 배워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공연하는 거였다.(물론 남악/무에 비해 폄하되긴 했다.) 이게 왜 나쁘지? 무슨 드라마에서처럼 기생이라하면 술따르고 남자들 비위나 맞추고 수청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쫌 싸그리 잊으소. 나름 국가가 교육시킨 전문예술가들이 관기들이었고 관기와 관계 잘못맺으면 철퇴맞고 최소 파면, 심하면 귀양크리였다. 종모법은 논란이 많지만 당시의 사정상 그럴수 밖에 없는 명분이 있었다. 중세시대에 장정이 몇사람씩 붙어도 흉년들면 꼼짝없이 굶어죽는 생산력으로 보건대, 아이딸린 여성 혼자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아무 남성과 같이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 당시 지배층이던 유학자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있어서 여러 남성에게 시집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그 소생들을 양인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거다. 자손을 양인으로 만들려고(거꾸로 세도가의 노비로 만들려고도 했다.) 이 아이의 아비는 양인이라 우기며 진짜 아버지인 천인과 대질시켰을 때 아이가 아버지 뺨을 치고 쌍욕을 하는 일까지 생겼고, 심지어 정종도 후궁 중에 천인여성이 있었는데 이 여성이 낳은 아이를 본인 아이가 아니라고 딱 짤라 버린 일이 있을만큼 당시 결혼과 동거 그리고 이에 따른 자손의 문제는 왕실이라고 자유로울 수 없을만큼이나 어지러웠다. 지금처럼 DNA 검사 할수 있었으면 '다 검사해서 아비를 따르게 하자' 고 난리를 쳤을걸?? 부계중심의 승통을 목숨같이 생각했던 유학자들인데... ㄴ 애초에 그전까지는 일천즉천이었는데 일천즉천보다 종모법이 노비 수가 확 늘어난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린지 음악 - 악보라고 할 수 있는 정간보를 만들었고, 편경, 편종 등의 [[악기]]를 발명하게 하였다. 이때 세종대왕이 절대 음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악기]] 소리를 처음 듣고 "이 음이 아니다."라 하시며 편경을 조사하시매 편경이 덜 갈려 묻은 먹을 발견하고 먹의 위치까지 돌을 갈게 한 뒤 다시 연주하자 그때서야 만족하셨다고 한다. (이 음이 '파 샵'에 해당하는 음계였다 한다) 절대 음감도 절대 음감인데, 그 정도로 미세한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면 [[황금귀]]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정간보가 나오기 전까지의 악보는 음의 길이, 높이를 나타내지 않아 정확히 연주할수 없었는데 정간보에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어 정확히 연주 할 수 있었다. 농업 - 당시 [[조선]] 땅에는 맞지도 않는 [[짱개|훌륭한 개]] 농업 책을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좆|고추]]같다고 [[조선]] 땅에 맞는 새로운 농업서를 만들게 함(농사직설). 이후 조선의 쌀 생산량이 4배가 치솟았다. 물론 대비책을 해놓는다고 해도 기후가 안 따라주면 대기근이 발생하는지라 현종 때 소빙하기로 인해 경신 대기근이 찾아왔고, 숙종 때 한 번 더 찾아온다. 조세 -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공법과 조세법을 뜯어고침. 정확히는 조세법을 뜯어고치면서 공법을 시행하였다. 조세감면법인데 흉년으로 농사가 망하면 쌀을 조금 걷고 풍년으로 잉여 쌀이 남아돌면 쌀을 많이 걷는 방식이다. 지금으로선 당연한거 같지만 당시엔 획기적인 방안이였다 하더라. 이때 시행한 게 공법인데 이것이 국민투표이다. 물론 노비, 여자는 제외한 양인 이상 남성만 하였다. 학자들은 기록된 역사중에 세계 최초라고 하는데 [[알게 뭐야|알 게 뭐야]]. 투표하고 뜯어고치는데 10년이 걸렸다. 오랜 기간을 거친 만큼 이 제도가 조선 전기하고 중기를 거진 지탱하다시피 한다. 나중에 구한말에 일제가 조선 침탈에 앞서서 제도 조사하다가 자기들 생각과는 달리 조선이 상당히 발전한 조세제도를 가졌던 거 보고 경각심을 가져 조선을 더 옥죄기로 결심한다. 천문 - [[농업]]과 마찬가지로 [[짱개|훌륭한 개]] 월력이 우리네랑 안 맞아서 몰래 만들게 했는데, 이는 당시 달력 수정이 [[짱개|훌륭한 개]] [[황제]]만이 가능한 권위의 상징이었기에 그렇다. 아무튼 몰래 월력을 만든 게 지금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많은 발명품을 제작했는데 특히 '혼천의'라는 물건은 별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절기를 예측하는 기구였는데 최근 [[천조국|미국]] 박물관에서 매우 멋지다며 전시를 허가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과학 - 주로 장영실을 노예처럼 굴려서 해시계를 만들게 하였다. 물시계도 만들게 했는데 시간이 [[존나|고추가 설 만큼]] 정확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측우기]] 등 [[존나|고추가 서]]게 만듦. ㄴ 측우기는 엄밀히 말해 아들 문종이 만들었다. ㄴ 세종대에 착수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세종 말년은 문종치세라 보는게 타당해서 문종이 만든거 맞다. 우리는 [[일본]]을 기준으로 하는 135도 시계를 쓰지만 이미 세종 때 정확한 우리나라 127도 시계를 만든 거다. [[존나|고추가 발딱 설 만큼]] 대단한 거다. 시간 뿐만 아니라 절기까지 알리는 기구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135도 시계를 쓰는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는거다. [[북한]]이 평양 시간을 만들었는데 별로 좋지 못한 평을 들은 이유를 상기해보라. 의학 - 세종은 [[왕]]이 되서 처음 본 딸을 극진히 이뻐하는 딸바보였는데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울부짖으며 의학 서적을 편찬하였다(의방유취). 딸 죽어서 슬프니 나같은 아비가 없으라며 의학서적을 만드시는 위엄. 인권 - 죄수들이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감옥]]에서 죽는 [[일]]이 많았는데 항상 깨끗한 [[물]]을 주게 하였고 주기적으로 [[목욕]]도 시켜주었다. 심지어 얼음도...ㅎㄷㄷ 또 어린아이와 [[노인]]에게는 죄목을 [[얼굴]]이나 [[몸]]에 새기는 형벌은 받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도 약간 남아있기는 하지만 도살업자는 예전부터 굉장히 천시받는 직업이었다 (그 전에는 이 도살업자를 화척, 양수척등 ㅇㅇ척이라고 부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께서 그 당시에 양인 백성의 호칭인 ''백정''을 도살업자도 같이 쓰게 하셨다. 하지만 역시나 [[헬조선|지옥조선]]의 조상답게 어떻게 저렇게 비천한 화척놈과 같은 명칭을 쓰냐고 [[빼애액|사랑물을 빼 달라고 하]]며 백정이라는 명칭을 버렸고 결국 도살업자만 백정이란 호칭을 쓰게 되었다. 장애인 복지에도 힘쓰셨다. 세종 27년에 서운감이라는 걸 설치했는데 이 서운감이 뭐냐하면 맹인학교다. 당시 맹인새끼들은 그냥 천대받고 구걸이나 하기 일쑤였으며, 점복업이 허락되었다지만 점복업을 배워야 점을 쳐서 돈을 벌 것이 아닌가? 이런 전차로 맹인놈들이 불쌍하게 살자 우리 킹갓세종님은 직접 국립학교인 서운감이라는 장애인학교를 세워서 명과학(길흉화복을 점치는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특히 여기 졸업생들 중에 우수한 성적을 남긴 인원은 국가의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명과맹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이제 침탈 시절 갑신정변으로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수립되고 나서 없어졌다. 복지 - 관노비는 [[여자]]가 애를 낳으면 100일 [[휴가]]를 주었다. 남편은 30일 휴가를 주었다. 이는 현대 [[헬조선|지옥조선]]의 웬만한 기업들의 출산 휴가보다 많다. <ref>이에 신하들이 '우린 왜 출산휴가 안주나요?'하고 개기자 세종 왈 '니네들 마누라는 애 낳음 혼자있니?? 보살펴 줄 사람이 천지면서 먼 헛소리심? 노비는 애낳으면 남편말고 누가 밥해주고 보살피냐?' 하고 일축하셨다. 요즘 세상 마초들보다 훨씬 진보적이시다;;</ref> 특히 [[집현전]]의 경우 당시 [[왕]] 진상품이었던 [[존나|고추가 설 만큼]] 귀한 [[귤]]을 [[집현전]]에 쌓아두고 먹게 하였으며, 한쪽 방에 항상 술상을 마련해 음주도 즐기게 하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유급휴가도 주었다. 80세가 넘는 [[노인]]들은 날을 잡아 궁궐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100세가 넘으면 옷과 음식을 하사해 주었다. 근데 당시에 100살 넘게 산 거는 오늘날로 치면 150살까지 산 셈이다. 당시 위생과 [[의학]]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ㄴ 관노비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지금도 9급 관노비나 공노비 등은 복지가 좋은 편이다. 사노비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딴거 없다. 뭐 없긴 한데 그러한 사노비라도 함부로 줘패고 죽이고 했다가 걸리면 귀양크리. 이건 조선조 전반에 걸쳐 그랬다. ㄴ 아무리 관노비라도 결국 노비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노비를 위한 복지를 폈다는 걸 보면 시대를 초월해도 한참 초월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노비야 당시 조선시대 상황을 감안해 보면 개인 사유재산인데 어쩔 수 없는 거고. 영토확장 - 세종이 '세'(世) 자 시호를 받은 가장 직접적인 업적. [[여진족|오랑캐]] 새끼들이 자꾸 건드리니까 화나서 여진족을 [[줘팸|쥐어박고]] 현재 함경도 지역을 제패했다(4군6진). 그 뒤 농사꾼들이 많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일부 백성을 그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켜서 개척한다. 물론 관직 부여, 신분 상승, 3년간 세금 면제 등 [[흙수저]]나 노비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남쪽에서 도적질하던 왜구 해적들을 소탕하며 대마도를 정벌했다. 당시 대마도주 입장에서는 이름뿐인 지역의 지도자고 반대파 왜구무리에 모가지 언제따여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는데 하늘이 도운 셈. 덕분에 남부 평야 지방등은 고려 말 조선 초 극심했던 왜구의 노략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ㄴ 사실 이 과정에서 다소 강제성이 있었긴 했다. 죽어도 [[북쪽]]으론 안 가겠다는 백성들을 억지로 이주시켜서 원성을 샀다. 그런데 한반도 전체의 방위 안전을 위해선 이정도 자연경계 확보가 필요하다고 봐서 진행한 것. '''-아래부터의 내용은 세종의 [[부정]]적인 업적을 다룹니다-''' {{지랄}} ㄴ역센징 아가들의 주장이 있다. [[노비]] 제도의 확립 -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노비]]의 인구는 5%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신분이 세습되지 않고, 사고 파는 행위가 불가능하였으며, 쉽게 해방이 가능하였다. [[노비]]는 고려시대때 까지만 하여도 현재의 '집사'의 개념이었다. 이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까지도 이어졌지만, 세종 14년 노(노비의 노)가 양인 여자와 결혼하면 그의 자녀도 노비가 되며, 비(여성 노예)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 역시 자녀가 노비가 되도록 하는 법이 통과됨으로써, 이로 인해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노비의 인구가 4할에 육박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노비의 법적 권리의 박탈(세종 4년)로 인하여 노비를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게 되었으며, 노비는 주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고발할 수 없게 된다. ㄴ 사견으로 변호를 하자면, 노비종부의 경우 발정난 양반놈들이 여기저기 씨를 뿌려 지체높으신 자제분들을 양산할 확률이 높기때문에 노비종모를 통해 제동을 걸어 볼 요량이였을지도 모른다. 마님이 돌쇠에게만 쌀을 주는 경우는 영화에서나 나올정도로 흔치 않으니까. 물론 사람의 속마음이야 누가 알겠냐만은. 세종은 조선 사대부들만의 성군이었다. 예를 들어 종모법 같이 조선의 민중들과 양반의 이해관계가 상충 했을 때 사사건건 양반 편을 든게 세종이다. 역사를 쓰는 사관도 결국은 유교적 성리학자였고 사대부였다. 신하들 입장에서 신하들 이익에 반하지 않고 주자학에도 부합하는 결정을 한 게 세종이었으니 사관들 입장에서는 성군이었겠지 ㄴㄴ 고려시대에도 노비는 세습됐다. 고려 초기부터 노비종모법과 같은 내용인 '천자수모법'이 법제화되어져 있었으며 고려 후기의 노비제는 부모 한쪽이라도 노비면 무조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제였다. 이걸 태종 때 노비종부법으로 바꾸었다가 신하들의 반발이 너무 심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케이스들 때문에 사회적 혼란도 있으니 노비종모법으로 바꾼거다. 그리고 세종은 노비 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 양천교혼을 금지하는 조치를 수차례 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노비 수가 늘었던 주요 원인이 양천교혼이며 세종이 실시한 노비제도가 고려시대의 제도와 큰 차이가 없는 점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에 노비 수가 늘어난 것을 세종의 책임이라 하기는 힘들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데에는 양천교혼을 합법화하고 일천즉천제를 확립시킨 후대의 왕들의 책임이 크다. [[사대주의]]의 확립 - 태종 때까지는 조선 자체적으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동방]]을 지키는 하늘신에 대한 제사). 세종은 세종 10년까지 신하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지만, 그 이후 이 제사를 [[폐지]]한다. '어떻게 [[명]]나라의 제후가 되어서 [[황제]](명)의 뜻에 따르지 않고 우리끼리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라에 심각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다. 또한, 명이 상서로이 여기는 청매(해동청)라는 새를 잡기 위해 한겨울에 사냥을 하도록 하였고, 청매 한 쌍을 잡아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추가적인 청매 사냥을 지시하여 백성들을 고생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아말로 [[지극정성]]의 사대였다. 세종 이후로 [[사대주의]]는 계속되었으며, 1897년에 이르러서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인 [[환구단]]을 재건함으로써 지성사대주의의 막을 내린다. 북방개척(사민정책 한정)-사실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업적이긴 하나, 사민정책 한정으로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착출된 인원의 다수가 역질로 죽기까지 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백성들이 가기 싫다고 자해하고 일부러 다리 장애인 만들면서까지 발악했는데 그런 얘들은 아예 엄벌을 처해놨다. 결국 고향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자살했다는 백성도 있다. 지금은 고향은 고향일 뿐이지만 그때는 삶의 터전이고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니 반응이 이럴 수 밖에. 화폐정책- 시장경제가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진하였다. 강경한 조치까지 취해 애꿎은 사람들이 죽은것은 덤이다. 수령고소 금지법-보수꼴통 허조의 말을 들어서 시행한 정책이다. 당연히 수령을 고소할수 없다면 수령의 죄를 물을 방법이 없는데, 세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견인 허조를 따랐다.성종만큼의 태평성대일수 없었던 핵심 이유다. ㄴ 이 법으로 인하여, 안그래도 미친 연기와 절차덕에 무용지물인 신문고가 개노답이 된다. 시발 수령때문에 억울해서 신문고를 때렸는데 고소는 안되고 나만 고소금지법으로 잡혀감 ㅋ. 참고로 수령 뿐 아니라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지 못하는 등, 절대적 상명하복관계의 다방면에 걸쳐있는 법이다. ㄴ 세종은 재위기간 내내 이 법이 대의로는 맞으나 실정에는 맞지 않다며 고민했다. 결국 대의를 택했고 이는 세종 스스로가 유학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세종의 한계라기 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학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들이 세운 나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이 끝매 가질 수 밖에 없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종 사후 5년, 왕을 폐한다. 수령이 아니라 왕이라 괜찮나보다. {{센들센들}} 여담으로 이 문서의 작성기록을 보면 예전엔 세종대왕의 오점을 설명하는 문단이 따로 있었는데 역센징 새끼들이 이때다 싶어 세종대왕에 대한 모욕과 욕설로 문단을 개판으로 만들어 놔서 지금 그 문단은 토론으로 옮겨진 것 같다. 보지 마라. 골때린다. 윗글이 훨씬 깨끗하네 (2016년 9월 15일 추가) 결국 토론 문서에 비로그인 제한 죽창이 들어왔다. [[역센징|역사를 왜곡하는 조선인]]들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병신들. 그리고 어휴 고추드립좀 그만좀 쳐라 좆같은 새끼들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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