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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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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본 망명~[[신해혁명]]=== 좆본으로 런한 변법파 일당은 1900년의 [[의화단]] 폭동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염치없게도 지들이 실각시켰던 리훙장에게 광서제 복위, 변법파 복권을 요청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ref>어차피 실각했으니 돕기도 어려웠다. 근데 안도와줬다고 변법파 또라이들한테 또 욕먹었음</ref> 청이 자기들의 애국심을 몰라준다는 생각에 분노한 량치차오는 공화주의+연성자치로 전향했으나, 미국 여행<ref>이게 사실은 캉유웨이가 보낸거였다. 량치차오가 쑨원이랑 가까워지려고 하니까 훼방놓을라고 보낸거임</ref> 을 다녀온 후 '중국인은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다. 중국인의 계몽을 위해 점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라면서 입헌주의자로 다시 전향해 캉유웨이와 함께 보황회를 이끈다. 다만 혁명파의 주장도 일부 수용해 광서제를 총통으로 하는 공화국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때부터 량치차오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주도한건 교육, 언론을 통한 계몽+민권 신장과 이를 위해 현실에서 말하는것처럼 글을 쓰자는 '백화문', '언문일치'운동이었다. 이때 량치차오가 글을 쓰던게 당대 짱깨 넘버원 신문이었던 신민총보다. 또한 계몽주의자긴 했지만 [[왕징웨이]]같은 꼴통은 아니었다. 미국사회의 빈부격차, 인종차별에도 주목하고 서양이 사회, 국가관은 우수하지만 개인의 수양, 가족관은 중국보다 못하다고 보는 등 동서양 각각의 장단, 문화적 차이가 있는거라고 보았음. 중화문명도 훌륭하지만 생존을 위해선 근대화가 불가피하다는 정도? 또한 이 시절부터 캉유웨이와의 관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량치차오가 각종 번역서를 읽고 미국에 다녀오면서 계몽주의자가 된 반면 캉유웨이는 여전히 유교탈레반이었다.<ref>오히려 광서제의 은혜를 갚아야한다면서 이전보다 심각한 수준의 친청주의자 유교탈레반이 되었다</ref> 캉유웨이는 제자의 연성자치 주장+혁명파와의 교류를 띠꺼워했고 수시로 파문하겠다며 협박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근대적 사제관계를 부정할 수 없었던 량치차오는 캉유웨이가 지랄떨때마다 죄송하다며 빌었다. 제자가 의심스러웠던 캉유웨이는 별 개좆같은 건수들을 들어 시비를 걸었는데 심지어 량치차오가 헤어스타일을 서구식으로 바꾼거까지 트집잡고 지랄했다.(캉유웨이는 귀국하면 바로 변발할거라며 스킨헤드 유지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유교 탈레반 캉유웨이는 망명 생활중 돈을 존나게 썼고 쓸데없이 사업을 벌이다가 싸그리 말아 먹었는데, 이거론 모자랐는지 이게 다 량치차오 때문이고 자기는 책임 없다며 선동하고 다녔다. 이리하여 사제관계는 점점 씹창이 났다. 신해혁명 직후쯤 되면 복벽을 주장한 캉유웨이에게 량치차오가 그만 은퇴하시라고 권하는 지경까지 간다. 혁명파와도 좋지 않은 관계였다. 혁명파는 청조의 존속을 주장한 량치차오를 '니 종만주족 적폐 아님?'이라면서 욕하기 시작했다. 사실 사상 차이도 차이지만 량치차오가 쓸데없이 문제를 만들었다. 원래 [[쑨원]]이랑은 첨엔 제법 친했는데 둘이서 한창 연대할까말까 하던 시절에 량치차오가 쑨원의 대표적 지지기반이던 하와이 차이나타운을 보황회로 전향시켜서<ref>그리하여 1905~1910년엔 혁명파가 하와이에서 걷은 정치자금이 보황파의 5%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쑨원은 그의 자서전에 이 당시가 신해혁명 이전의 가장 큰 위기였다고 적었다.</ref> 쑨원이 분노한것.(쑨원이 김대중이라면 하와이는 목포, 신안이었다) 쑨원 입장에선 자기 본진을 빼앗아간 것만으로도 존나 열받는데, 그놈이 앞에서는 연대 주장하면서 뒤로는 텃밭 빼앗는 통수를 시전했다고 생각하니 더 열받았다. 덤으로 나이도 쑨원이 7살 더 많아서 어린놈의 새끼가 상도덕이 없다며 또 한번 분노했다고 한다. 이에 정알못 량치차오는 자기는 단순히 연대목적으로 그런건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거고 앞으로도 선의의 경쟁을 계속 하자고 답했다. 이에 개빡돈 혁명파는 량치차오와 키배를 벌여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그런데 이걸 승리라고 하기도 뭐한게 이 키배는 6명이 량치차오 하나를 다굴깐거였다. 또한 혁명파는 논리로 승부하기보단 반만주족 감성팔이를 시전하고 보황회의 정치자금 횡령<ref>물론 이것도 캉유웨이가 사업한다고 날려먹은거다</ref> 을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신민총보 사무실들에 의문의 화재사고<ref>자꾸 쑨원놈이랑 엮이는 량치차오를 띠꺼워한 캉유웨이 휘하 탈레반들이 벌린 일이라는 썰도 있다</ref> 가 일어났고 일부 혁명파 당원들이 연설하는 량치차오를 찾아가 폭행했다. 이후에 량치차오가 ㅈㅈ친것 캉유웨이, 쑨원 모두에게 욕을 쳐먹었지만 아무튼 중국 국내의 향신층(얘넨 어쨌든 기득권이라 청조 멸망으로 인한 혼란까진 원하지 않았다)은 량치차오의 주장을 제일 그럴싸하다고 여기며 밀어주기 시작했다. 이에 때가 되었다고 직감한 량치차오는 좆본령이던 타이완으로 이주해 각을 보기 시작했으며 사실상 입헌파의 거두가 된다. 량치차오의 주장=청말 향신층 입헌파의 주장이라고 봐도 무방함. 이때의 량치차오는 그야말로 청말 입헌파의 전형으로, 만주족 주도로 1906년부터 시행된 신정은 복고적이라며 반대했고 향신층의 보로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신해혁명 당시 윈난 독립을 주도한게 그의 꼬붕 차이어였고 쓰촨, 후베이의 신사층한테 독립하라고 선동한 것도 량치차오였다. 다만 연성자치론을 주장한 것뿐이지 이때까진 입헌주의자였다. 그가 공화주의자로 돌아서는건 신해혁명 이후 청조정의 권위가 완전 상실되고나서다. 다른 입헌파들처럼 신해혁명 이전까진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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