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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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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 == === 시내동 지역 === ==== 대신동 ==== #신음동('''新音洞''') : 김천시청, 김천시의회, 김천시 보건소가 있는 김천의 행정중심지이다. [[부군면 통폐합]]이전까지 김산군 군내면 부거리(富巨里), 금음리(琴音里)<ref>1600년경에 생성된 마을로 [[거문고]], [[부채]]모양의 바위가 마주보고있어 거문고 소리가 난다고 금음리라고 했다.</ref>, 금신리(琴新里)에 속했다. 이 3개동이 신음동으로 스까, 금릉면 신음동이 되었고 1938년 10월 1일 금릉면이 김천읍에 흡수되면서 김천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3년 삼애원<ref>1956년 [[나병]]환자들을 격리시켜 만들어진 집단거주지였다.</ref>을 흡수했다. 1997년 ~ 1998년사이 대응동, 김산동을 흡수해 대신동이 되었다. [[신음|이름]]이 이상한 건 기분탓이다. 그래서 김천 사람들은 외지인한테 소개할 때 법정동의 이름 아니라 98년 신설된 행정동의 이름인 대신동으로 칭한다. 하지만 김천의 급식충들은 대광동이 어딘지 모르는 새끼들이 대부분이고 신음동이 대신동으로 바뀐줄로만 안다. 대신동이 98년에 만들어졌는데 그걸 모르다니 참.... #교동('''校洞''') : 삼락동과 함께 본래 김산군의 중심지로서 중심지답게 향교와 향청이 있었다고 향동(鄕洞)으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1914년 교동으로 통폐합되어 금릉면에 속했다. 1938년 10월 1일 금릉면이 김천읍에 흡수되면서 김천에 속하게 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삼락동, 문당동과 합해져 '''김산동(金山洞)'''이 되었다. 김산향교는 [[임진왜란]]때 1차로 통구이되고 1634년 강설이 재건했다가 [[6.25]]때 다시 훼손되고 이후 1973년 현경길에 의해 복구되었다고 한다. #삼락동('''三樂洞''') : 교동과 함께 조선시대 김산군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김산군아 동헌, 즉 김산군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본래 김산군 군내면 상리동, 중리, 하리, 금평리에 속했으나 부군면 통폐합 때 삼락동으로 통폐합되었다. 1960년 舊 금평리지역은 삼락2동, 나머지는 삼락1동으로 분리되었다가 1975년 원상복귀되었다. 이후 1983년 문당동과 합하여 금산동이라 했다가 1998년 대신동에 스까되었다. #문당동('''文唐洞''') : 삼락동 서북쪽 골짜기 지역을로 서쪽 구봉산 지백을 기점으로 봉산면 인의동과 접한다. 본래 [[부군면 통폐합]]이전까지 당동, 문산리, 백천리가 있었다. 조선초기 舊 문산리지역에 문산역이 있었고 백천리엔 [[김종직]] 병신새끼가 백수되서 서당을 짓고 그곳에서 [[사림]]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응명동('''應鳴洞''') : 본래 김산군 천상면 괴동(槐洞), 독정리(獨井里), 아홉사리, 응명리(應鳴里)였다가 1914년 통폐합되고 아천면에 속했다. 1928년 어모면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1983년 2월 15일 대광동과 대응동으로 합동되어 김천시에 소속되었다. #대광동('''大光洞''') : 본래 개령현 서면 대보리(大洑里), 묘광(妙光里), 신곡리(新谷里)가 있었는데 부군면 통폐합때 대광동으로 통폐합되어 김천군 개령면에 속하게 되었다. 광덕산 기준으로 동남쪽이 舊 묘광과 신곡이 있었고 대보는 남쪽에 있었는데 이지역은 [[보통사람]]시기 공업단지가 되었다. [[탱크보이]]가 머통하던 1983년 2월 15일, 응명동과 함께 '''대응동'''으로 통폐합되거 김천시로 편입되었다. ==== 대곡동 ==== '''大谷洞''' 1983년 백옥동, 다수동이 미곡동으로 통폐합되었고 1998년 부곡동과 미곡동이 스까되어 대곡동이 되었다. #부곡동('''富谷洞''') : 김산군 김천면 가마실, 문지알, 원동이 있었다. 이후 1914년 금릉면 부곡동으로 통폐합되었다. 이중 개미실지역에는 굴곡부곡(屈谷部曲)이 있었다. #다수동('''多壽洞''') : 김산군 미곡면 신기리(新基), 이로리였는데 1914년 금릉면 다수동이 되었다. [[성종]]치세 조선의 시인이던 전만령이 백수가 도고 이지역에 정착해 집성촌을 이뤘다고 한다. 舊 신기리 지역에는 전만령선생을 기리는 재실인 미곡정사(微谷精舍)가 세워졌다고 한다. #백옥동('''白玉洞''') : 김산군 미곡면 옥산동, 본리, 노증리이 있었는데 1914년 인근에 있던 옥녀봉(玉女峰)에 이름을 따와 백옥동이 되었다. 중심지는 舊 노증리지역에 형성되있다고 한다. ==== 지좌동 ==== '''智佐洞''' 김천시가지 동쪽에 있으며 북류하는 감천 남쪽에 있다. 1983년 2월 15일, 지좌동과 덕곡동을 법정동으로 관할하고 있다. #지좌동('''智佐洞''') : 황산(黃山)주변에 이뤄진 마좌산리(馬佐山里)<ref>《 금릉지(金陵誌) 》에 따르면 역리들의 거주지역이었다고 한다.</ref>, 지대리(智大里), 배다리등의 부락이 있었는데 [[갈대]]밭이었다고 한다. 모두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했고 1914년 지좌동으로 스까되어 감천면에 들어갔으나 1938년 10월 1일 김천읍에 흡수되었다. 조선후기 [[천주교]]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위에 있는 국책사업에 애새기를 꼬라박는 [[북괴]]새끼마냥 애들에게 강당수리를 맡긴 문성중학교가 이곳에 있다. #덕곡동('''德谷洞''') : 1609년 신촌 권동못 근처에서 살던 주민들이 [[산적]]을 피해 이주, 정착하여 만들어진 덕곡(德谷)<ref>마을 형태가 호리병처럼 좁은 입구를 지나면 넓은 마을이 나온다고 하여 호동(壺洞)으로도 불렸다.</ref>, [[광해군]]시기 문병주가 개척했다고 전해지는 응곡(應谷)의 2개마을로 구성되어있었고 개령군 농소면에 속했다 . 1914년 호동의 이명이던 덕곡('''德'''谷) + 응곡(應'''谷''') = 덕곡동이 되었다고 한다. ==== 양금동 ==== '''陽金洞''' 1997년 9월 25일 양천동과 황금동이 합해지면서 만들어졌다. 본래 1949년이전까지 신기동또한 관할했다. #양천동('''陽川洞''') : 김천시 남쪽 고성산 동쪽에 펼쳐진 감천 냇가의 들과 고성산 남쪽 기슭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통칭 '''하로(賀老)<ref>[[당나라]] 여지시랑 하지장(賀知章)이 늙어서 은퇴를 한 뒤 신라에게 감호일곡을 받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고려]]멸망이후 금산 안렴사였던 화순 최씨 원지(元之)가 고성산 아래에 있는 구암사(耉岩寺)에 은거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관리가 되자 그를 하례받은 노인이라 하여 하로로 존칭한 데서 왔다는 설로 유래에 대하여 2가지 설이 있다.</ref>'''라고 불리는 양곡(陽谷), 음지(陰地), 중리(中里), 신기동의 4개마을과 안정계(安靖溪), 노천리(盧川里)등의 부락으로 구성되었으며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했다. 1914년 노'''천'''리 + '''양'''곡리 = 양천리로 합해졌고 1949년 신기동이 합해졌다. 하지만 1936년 노천리가 홍수로 없어졌고 300m 남쪽에 옮겨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황금동('''黃金洞''') : 본래 좌동(左洞), 우동(右洞)<ref>現 황금동 성당일대.</ref>, 약수동(藥水洞)과 같은 3개 부락이 있었고 김산군 김산면에 속했다. [[부군면 통폐합]]시기 [[일본 제국|좆본]]이 당시 이지역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만들면서 3개 부락을 '''고가네마치(黃金町)'''로 합하면서 만들어졌다. 당연히 [[8.15 광복]]이후 일제의 지명을 갈아버리던 1946년 황금동으로 개명되었다. 1960년 1동과 2동으로 나뉘었다가 1983년 재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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