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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낸 고려는 신라 왕경을 경주(慶州)로 개편시켰다. 940년에는 경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시키고 휘하 양부, 사량부, 본피부, 모량부, 한기부, 습비부의 6부는 각각 중흥부(中興部), 남산부(南山部), 통선부(通仙部), 장복부(長福部), 가덕부(加德部), 임천부(臨川部)로 개명시켰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신라멸망이후 월성이 슬럼가로 변하고 지금의 경주시가지에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경주읍성이 쌓이기 시작했다. 신라 왕실을 어느정도 포용시켰다 하더라도 이들이 허튼짓을 할 것이 두려웠던 고려 조정은 경주와 경주출신인 舊신라세력을 고려 중앙정부에 들이는 것을 되도록 지양하는 분위기였지만... [[왕건]]이 죽은 뒤 허구연날 터지던 케찹파티로 인해 고려 중앙정계의 주축이었던 [[개성시|개경]], [[평양직할시|서경]]출신 고위관료들이 갈려나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성종#고려국의 6대 대왕|성종]]이 케찹파티로 개판 5분전이던 중앙정계를 어찌어찌 안정시킨 뒤 舊신라세력을 중앙정부로 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987년에 동경(東京)으로 승격되었고 995년 지방 수도를 통치하는 중앙행정기관인 유수사(留守使)가 설치되었고 10도가 설치되면서 영동도(嶺東道)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경순왕이었던 [[현종 (고려)|현종]]<ref>아버지 안종은 경순왕과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ref>은 매년 3경에 왕이 행차해서 연회를 베풀어야 하는데 너무 멀다고 1012년 동경유수관을 경주로 격하시키고 방어사(防禦使)를 파견시켰다. 2년뒤 4도호부 체제를 정비하면서 경주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설치했다. 하지만 1030년 동경유수로 롤백시켰다. 이후 동경은 [[평양시|서경]], [[서울|남경]]처럼 그 지역 출신이 아닌 중앙관리들이 임명된 유수관과 서경의 서경관과 같이 토박이 향리들이 통치하는 자체 행정기관이 따로 설치되었다. 모두 후자가 실질 행정을 담당하고 전자가 후자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지 않나 감시하거나 서로 견제하는 구도로 3경이 운영되었는데 동경의 경우 '경주사(慶州司)'가 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경주사는 호장정조 4명, 섭호장 4명(호장 최종 8명), 부호장 4명, 호정 2명, 부호정 2명에서 휘하 병정, 부병정, 창정, 부창정, 사옥정, 객사정등 이런저런 향리를 위한 관직으로 구성되었다. 경주 토착성씨중에서 [[경주 이씨]], [[경주 김씨]], [[경주 최씨]]가 경주사 호장을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우왕]]이후 경주 김씨와 경주 이씨가 경주사의 호장을 차지했다.<ref>경주부호장선생안.</ref> 하지만 강력한 행정권으로 유수관과 [[자강두천]]의 빅매치를 벌이던 서경의 서경관과 달리 이쪽은 실무는 다하는데 무신정변때 경주사가 반란에 참여하자 속군인 [[영천시|영주]]의 향리들이 경주사가 이끄는 반란군을 족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권한이 병신이었다. 유수관에는 동경유수사(3품이상), 유수사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지유수사(3품이상), 부유수(4품이상), 개경에 있으면서 감찰만 하는 판유수사(3품이상), 판관(判官, 6품이상),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7품이상), 장서기(掌書記, 7품이상), 지역의 사법집행을 담당하는 법조(法曹, 8품이상),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醫師, 9품이상), 교육과 문장을 담당하는 문사(文師, 9품이상)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주출신들이 너도나도 중앙관직에 진출해 한자리를 해먹으면서 중앙 문벌귀족의 핵심도시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무신정변]]이후 [[김보당의 난]]이래 '''"저 군바리새끼들 인정못한다!"'''라면서 1202년 동경 야별초의 난을 일으키고, 군바리들이 동경은 무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욷높이야 하면서 땅끄몰고 동경을 밀어버리면서 위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동경 출신인 [[이의민]]덕분에 [[조위총의 난]]이후 서경처럼 완전히 좆망하는 것은 면했지만. 하지만 1204년 [[신라부흥운동]]사건으로 인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을 먹고 휘하 속현, 영군이 모두 무신정권에 우호적이었던 도시인 [[안동]]과 [[상주]]로 예속되었다. 1219년 다시 동경으로 승격되었지만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황룡사]]를 비롯한 동경의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간섭기]]엔 고려의 위상이 격하되면서 1308년 계림부(鷄林府)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원간섭기 끝나고 잠깐 동경으로 복구되고 1378년 경주읍성이 재건되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경주부(慶州府)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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