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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식충 국뽕들이 하는 전형적 평가에 대한 반박 Ⅱ === 경신대기근은 조선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재해를 확대한 부분은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대책 없는 이앙법으로의 전환이었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저수지, 보 등의 수리 시설은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1인당 토지 면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가뭄, 자연재해 피해는 클지 모르나 노동력이 절감될 수 있는 이앙법은 지주 및 농민 입장에서도 꽤 매력적이었고 지주 층이 많고 1인당 토지면적이 넓은 삼남 지방에서 이러한 한탕주의식 이앙법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를 반증 하듯이, 경신대기근 때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곳은 삼남 지방이었으며 직파법과 밭농사 위주였던 경기 북부 지방, 함경 평안도 지방은 그렇게 치명적인 피해가 없었다. ㄴ 요동도 기근이 돌았다는데 왜 함경, 평안도는 피해가 없냐? 냉해나, 가뭄은 흔한 기후 현상이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수도 없이 발생했다. 만약 이 시대에 직파법이 유지되었거나, 이앙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충분한 수리 시설, 농민들의 자가 노력 (대기근 이후, 농민들은 두레 및 품앗이 등의 노동력 관리법, 민간 비용의 보 건설 등 각 향촌 단위별로 조직) 혹은 묻지마 한탕주의식 이앙법이 17세기에 유행을 타지 않았다면 경신대기근이 이렇게 큰 피해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농민은 벼 경종법으로 이앙법을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이앙법이 풍속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갑자기 금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고 수리 시설도 없이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논에 물 대기 농법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는 와중에 재해를 만나 더더욱 망하게 된 것이다. 즉, 요약하면 저수지와 보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민들의 한탕주의식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유행을 타고 있었고, 그것이 재해를 부풀렸다. 그리고 조선 정부의 벙찐 대응까지 겹쳐서 대량 아사와 같은 화를 더 불러온 것이다. ㄴ 그말대로면 보리철에는 기근이 없어야지 미친놈아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타령하는 국뽕충이 또 보이는데 시발, 세종대왕이 현종 때 살았으면 애초에 저수지 지어서 가뭄, 홍수에 좆털리지 않았거나 구휼미는 잘 풀어서 굶기지는 않았겠지. 이 사건 이후로 현종은 바로 '제언사'라는 저수지, 보 관리 관청을 신청하고 국가적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앙법을 쓰면 농사에는 편하지만 모내기 철에 가뭄을 만나면 크게 실농하므로 국가에서 권장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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