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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사상== ===유학=== 본디 일본의 유학은 불교와 융합되어 있었고 이전시대에는 대개 승려들이 유교를 연구하였었으나 에도 시대 초기부터 불교와 유교가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에도 시대 신유학의 창시자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였다. 승려이자 유학자인 그는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온 허성과 대면하면서 성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서 긁어온 성리학 서적들과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유학자 강항을 통해 성리학을 깨우치게 되었다. 특히 그는 퇴계 이황의 '퇴계전서'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일본 성리학이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막부의 공인 유학자가 되었고, 그 이후에도 하야시 가문은 대를 이어 막부의 공인 유학자를 전임하게 됨으로 인해 종국적으로 후지와라의 사상이 일본 정치사상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유교는 조선 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조선 유교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일본 유학자들은 성리학 교리의 실현을 통해 사회의 안정을 찾고자 하였고, 이가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 본래 퇴계 이황은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시하였으나, 일본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유교의 신성 논쟁은 관심 밖의 일이었고, 오히려 이들은 '인간의 천리로의 복귀'라는 덕목을 일축하였다. 일본 유교는 일본 불교와 마찬가지로 외래 문명으로부터의 수용 과정에서 본래 특성인 영원불멸성, 절대성 등이 거세되었고, 이로 인해 탄력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일본 유학의 이러한 특성은 유학의 다른 학파인 양명학과 고학(古學)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일례로 양명학자나 고학자들은 아예 천리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성리학의 교리를 '억측에 근거한 헛소리'로 폄하했다. 정통 성리학은 천리를 중시한 나머지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을 무시하고 폄하하곤 하였으나,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자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이와 같은 운동은 중국이나 조선의 유학계에서도 일각에 의해 일어나긴 했으나 그들은 천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 유학과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다만 양명학이나 고학 등이 일본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이들의 주장이 막부의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주류는 성리학이었다.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초기 막부의 무단통치의 막을 내리고 인문, 문화통치의 새 막을 열었는데, 에도 시대의 문화통치는 일본 성리학자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검약과 농민 부담의 경감 등을 추진하였고, 강압적인 통치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한편으로 유교는 일본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유학에는 중화사상이 함유되어 있고, 이 중화사상은 일본에서도 일본 맞춤버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에도 시대 일본 유학자들은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하였으며,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민족인 류큐와 아이누는 일본의 문명권에 포섭된 존재로 여겼고, 그 이외의 민족들은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국학(國學)=== 반면 에도 시대에는 기존의 주류학문들에 대한 반발심리로 국학이라는 새로운 학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국학은 일종의 국뽕학문으로, 중국 등 외래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유학이나 불학 등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대신 일본의 고유가치와 고대의 역사 등을 숭상/연구하였고, '고사기'와 같은 고전들을 근세 일본어로 번역하는 등 상당한 역사학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국학자들은 일본의 가치가 그 어느 오랑캐들의 가치보다 우수한 것으로 여겼고 일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국(神國)이라고 주장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유학자나 다른 일반인들도 국뽕을 빠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학자들에 비하면 약과 수준이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러 국학은 경세론(經世論) 및 해방론(海防論)과 연결되어 확장주의적인 정치적 성향을 띄게 되었고, 이는 대외확장론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들은 홋카이도나 대만, 더 나아가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나 만주를 정벌하자는 정만론(征滿論)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비록 에도 시대 이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무시할만한 수준이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 막부 말기~메이지 유신 시기에 국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다수 활약했다. 에도 말기부터 개국을 주장한 국학자 사쿠마 쇼잔은 가쓰 가이슈나 사카모토 료마 등의 스승이였고 친막파여서 그의 아들은 신센구미에 들어갔다. 쇼잔의 제자 요시다 쇼인은 막부에 저항하는 존왕양이를 주장하여 또 그 영향을 받은 제자(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고고로, 타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카모토 료마 등과 함께 유신을 주도했다. 쇼인은 현재까지도 정계에 영향을 끼치는 일본 우파들과 죠슈벌의 선조이다. ===난학=== 한편으로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서양 학문이 일본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경로로 유입된 서양 학문을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의미인 난학(蘭学 <I>란가쿠</I>)이라고 불렀다. 서양 서적의 일본 반입은 1640년에 쇄국 정책에 의해 금지되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의 개혁에 의해 일부 해금되어 난학이 융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도시 인구가 많았던데다가, 문자를 이해할 수 있는 인구의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도서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에 반입된 서양 서적들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대도시의 서점에서 팔려나갔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서양의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 그리고 서양인들이 얻어낸 세계의 지식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ref>일본인의 이와 같은 서양에 대한 이해가 메이지 유신을 통한 성공적인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ref> 난학은 단순히 학문에만 그치지 않고, 창조기술로 응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기술을 모방하여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나 상징성은 있는 아이템들을 만들어냈는데, 서양의 기계식 시계를 모방한 일본식 기계식 시계, 망원경, 카라쿠리(기계인형)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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