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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4공화국]] == {{독재자}} === 10월 유신 ===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대놓고 독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동시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체육관 ㅂㅅ ㅅㅂ ㅉㅉㅉ 파티를 하나 마련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선포하면 뭐하니 교묘하게 부정선거 좀 섞어서 유신 헌법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강압적인 분위기 조성 덕을 봤는지 압도적인 찬성 표가 나왔고 [[유신 헌법]]이 통과되었다. 직선제는 폐지되었고 대통령은 무제한 출마 가능에 박정희의 어용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니 박정희만 영원히 100%로 당선될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를 국민회의에서 치뤄 100% 표를 받고 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졌지만 선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1/6만 확보해도 원내 제1당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 대한민국 전체를 장악한 박정희는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고 다니던 김대중을 조지려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대중은 천조국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인맥이 있었고 김대중을 건드린 박정희는 당시 경제강국 탑에 들던 미국과 일본의 합동 공격을 받았고 결국 gg쳤다. 어쨌든 평소부터 박정희를 고깝게 보던 미국은 이 사건으로 박정희를 압박했다. === 긴급조치 === 하지만 박정희도 한 가지 쫄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운동권 세력이었다. 김대중을 조지는 것이 실패했으니 운동권 세력과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또 공격을 당했고 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라는 카드를 꺼낸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되어 개헌 논의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10년 전에 물거품이 됐던 중앙정보부의 작품 인민혁명당 사건을 한 번 더 꺼내 [[인민혁명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가짜 사건을 만들어내고 긴급조치 제4호를 발령시켜 민주계 인사들을 모조리 민주청년학생연합이라는 가상의 종북단체로 분류해 잡아넣었다. 하지만 [[문세광]]이라는 빨갱이가 반인반신 박정희의 와이후 [[육영수]]를 골로 보냈다. 그리고 빡친 반인반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 긴급조치 제9호 ====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가 발령되며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 금지'라는 사상 최악의 악법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반신욕'을 하면 남산으로 보내진다. 1975년부터 반 박정희 인사들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졌다. 대중가요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고 수많은 노래들이 금지곡 처리를 받았다. 이제 노래만 불러도 남산을 방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인 [[장준하]]도 등산하다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지면서 독재 분위기는 더욱 세졌다. 하지만 유신으로 북괴와 사이가 또 나빠진 데다 북은 남보다 더 심한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빅똥을 메인카드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더 미친놈인 덕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벌였다. 참고로 이때 북괴의 만행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병사 중 한 놈이 현재 청와대의 빅 적폐이신 디재스터 문프시다... {{문베읍읍}} 하지만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고리 원전]]이 세워지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78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뻔하지 뭐. 다들 알잖냐? 또 박정희가 이긴다. === 유신 정권의 몰락 === {{쌤통}} 한편 [[1973년]] 중동에서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이 터져 석유 수출이 중단되어서 세계 경제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1978년]]에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축출되고 [[1979년]]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또 석유가 막히고 세계경제가 침체되었다. 이 사건을 [[오일 쇼크]]라고 부른다. 박정희의 집권은 지속되었지만 세계 경제가 흔들리면서 국내 경제도 침체되었다. 마침 [[1979년]]에 오원춘 농민 납치 사건이 터져 민심이 나빠지고 국내 경제 침체는 YH무역 농성 사건을 일으켰다. 유신 정권의 한계가 전국적으로 터져나오자 [[김영삼]]이 유신을 디스했다. 그리고 헬조선도 이란 꼬라지가 난다고 또 깠다. 노발대발한 반인반신은 사상 최초로 김영삼 국회의원을 제명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터져나왔고 먼저 반발한 곳은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지지기반인 경상도의 부산과 마산이었다. 정확히는 들고일어난 곳은 PK이고 박정희 지지기반은 TK라는 차이기 있긴 하지만 믿었던 경상도에 발등 찍혔다고 생각한 반인반신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기로 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은 분명히 20년 전만 해도 자유당 떨거지들을 쓸어버리고 찬사를 받았던 박정희가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승만과 다른 최후를 맞이했다. ==== 10.26 사태 ==== {{대국적}} 이때 정부의 관료들과 박정희가 부마민주항쟁을 처리하기 위해 의논했으나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 박정희를 애널써킹하던 [[차지철]]이 탱크를 들고 모조리 찍어누른 다음 절대독재체제로 가자는 헛소리를 하자 [[김재규]]가 반사적으로 차지철의 대가리를 총으로 날리고, 뒤이어 박정희까지 쏴서 죽였으니 바로 [[10.26 사태]]이다. 멀쩡하던 머통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나라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고 [[최규하]]가 권한대행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 세력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26으로 긴급조치들이 전부 해제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회의에서 개최되어 최규하가 당선되며 나라가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 12.12 군사반란 === {{폭동}}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의 군 내 애널써킹 좆목회인 [[하나회]]의 주역들 [[전두환]], [[노태우]] 등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2.12는... 그 하나의 탱크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서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장태완]]이 반란군노무 쉐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군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은 5.16처럼 확실한 명분도 없어서 정권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다. === 서울의 봄 === {{민주화운동}} [[1980년]] 상반기, 박정희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유신 체제 아래서 민주화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니 바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우는 민주화운동 정국이었다. 하지만 신군부가 권력을 거의 장악하기 시작한 5월,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이 신군부 폭주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회군을 선언하면서 서울의 봄은 종식되었다. 이에 대해 말이 많은데, 민주화가 코앞인데 수포로 돌아갔다는 말과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논란이 있다. 지금은 박사모 엑윽보수가 된 심재철 본인이 알겠지. === 5.17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 === [[1980년]] [[5월 17일]] 밤 12시, 신군부가 기존 정부를 무시하고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으니 이것이 [[5.17 내란]]이다. 이제 정부고 뭐고 조때로를 시전하는 것이다. [[5월 18일]]에 광주에서 5.17 내란에 반대하는 투석전이 일어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개시되었다. [[5월 20일]] 계엄군이 시위대에 총기를 난사하며 항쟁은 격화되었고 계엄군끼리 서로 사격하거나 시위대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등 상황은 심각해졌다. 결국 [[5월 27일]]에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전부 장악하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무력진압당했다. 하지만 독일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호텔 택시 기사 김사복의 도움을 받아 광주의 상황을 취재하여 그 진상을 전세계에 알렸고, 신군부는 미국, 일본 등의 당대 제1세계 선진국들에게 지탄받았다. 이로 결국 신군부의 강경책은 수포로 돌아갔기에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히지만 신군부는 정신 못 차리고 김종필과 김영삼을 강제로 정계 은퇴 시켰으며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을 만들어 김대중을 또다시 조지려고 했다. 그리고 전두환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수 갈채로 당선됐다. 그리고 유신 철폐와 분위기 완화를 내세운 제5공화국 헌법을 발의했으며 [[10월 23일]] 국민투표에서 가결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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