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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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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42075] 4.19 혁명 유공자 중 한 사람인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4.19 참여자들이 박정희에 동조했다는 것은 그저 단면일 뿐이고 다른 면은 박정희 반대에 동조하거나 찬성하기도 했고 안동일 변호사가 그 예다. 남한이 유상몰수 유상분배 정책 시행하는 동안 정작 북한은 무상으로 몰수하고 분배 하나도 안 했다. 덕분에 혹부리우스에게 땅 뺏긴 이북의 지주들은 시팔조팔 하면서 전쟁 기간 중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몇몇 급식충들과 역알못 새끼들이 착각하는 게, 3.15 부정선거는 대통령 선거의 부정 선거가 아니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은 조병옥이 위장 수술 받고서 사망하는 바람에 단독 후보 출마로 이미 당선됐고 자유당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앉히기 위해 각종 수법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치른 것이다. 이승만이 부정 선거가 일어난 걸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고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3.15 부정선거를 계획한 게 자유당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각종 시위는 있어왔지만 헬조선답게 그런 일 없고 두들겨 패잡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왔다.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밑밥을 설명한다면 이렇다. 우선 대구 [[2.28 민주운동]]이 있다. 이건 대구 지역의 고딩들이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구 내려가서 선거 유세 연설하는 걸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한창 봄방학이었던 2월 28일 일요일에 임시 등교를 시키자 빡쳐서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근데 그게 전국적으로 유행이 되어서 몇천 명이나 시위로 몰려들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빨갱이의 선동이라고 잡혔지만 대부분 풀려난다. 대전에서도 3월 8일에 비슷한 일이 터졌다. 당시 야당 후보였던 장면의 연설이 이 날 공설운동장에서 계획되어 있었는데 각 고교마다 유세장에 나오지 말도록 훈육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중간에 거사에 합의한 학생 중 하나가 친형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3월 8일 장면의 연설이 끝날 때까지 학교에 묶어두려던 것을 좆까고 많은 대전의 고교생들이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서 1차 마산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상황이 심각하게 격렬했기에 몽둥이로 패고, 최루탄과 실탄까지 쐈다. 시위대에게 총 쏜 사례가 이것이 최초다. 그 결과 8명이 죽고 80명이 다치는데 그중에서 김주열이 있었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다.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정통으로 박힌 상태였고(사태의 심각성을 말하면 원래 최루탄은 그냥 하늘에 쏴서 광역 스턴을 먹이려고 있는 거지, 직접 조준 사격해서 죽이는 게 아니다. 근데 이걸 써버린 거다) 이 때문에 모친이 시신 인수를 거부할 정도로 충격을 먹었다. 이를 보러 온 사람도 수천 명이었고 다들 화가 나서 죽은 학생 살려내라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게 2차 마산 의거다. 4월 18일 그동안 마산 의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고려대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가장한 집단 시위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유당이 경찰만이 아니라 임화수 등의 정치 깡패까지 동원해서 진압하려고 하니까 시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하고 말았다. 경찰에 발포 명령에 죽은 대학생도 있었다. 이윽고 4월 19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날만 콕 집어서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에서 100여 명이 죽었고,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죽었다. ㄴ 보면 알겠지만 현재 광주 전라도 욕하는 보수나 부산 경상도 욕하는 진보라는 것들이 얼마나 병신들이고 진보/보수가 아닌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주의를 꿈꾸며 목숨을 거신 분들은 죄다 순국하고 열매만 따먹는 새끼들이 지들 자유민주주의 찾아준 사람들 헐뜯고 지역드립이나 치고 있으니 얼마나 능지가 처참한지 알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해 화가 난 게 아니라 부통령 부정 선거에 대한 시위라는 말도 있다. 근거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자택으로 갈 때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연호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승만 동상 끌고 다니는 시위대도 있었는데? [http://archives.kdemo.or.kr/isad/view/00700224] ...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여러 불만이 1960년 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해서 모든 게 터진 거라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야당 후보가 변변치 않거나 타이밍 맞게 대선 시즌 때 족족 죽어나가서 자유당이 그렇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거지, 그중에서 여러 변수를 빼면 과연 대선 때 순순히 이어질 지부터 의문이고. 그리고 시위대가 전체주의 집단도 아니고 사상이 다를 수도 있는 건데 그런 게 일반화 근거가 될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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