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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의 유래 === 판소리는 조선 중기나 되서야 그 존재가 나타난 분야다. 본래 전통 국악 창은 고려시대만 해도 서양의 오페라처럼 부드러운 창법이 대세였다. 이는 중국의 사서인 원사(元史)와 명사(明史)의 기록으로 비추어 볼 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원사에 이르기를 '고려의 가요는 그 음색이 청아하고 거침이 없다.', '고려의 가요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불리여 거리에 노랫 소리가 가득한데, 그 소리가 마치 옥석과도 같았다.' 라고 했다. 그러나 명사 융경제편에는 '조선의 가요는 그 소리가 기품이 없이 쇠 긁는 소리가 나니 듣기에 거북하였다.', '조선의 가요는 창부와 고수가 합을 이루어 소리를 내는데 그 모습과 소리가 흡사 걸인들이 구걸하는 소리와 같다.'라는 등의 혹평만이 가득하다. 융경제의 제위 기간은 조선의 중기에 해당하는 기간인데, 고려 시대만 해도 아름답다 칭송이 자자하던 음악이 어찌 저렇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난무하는데, 다음의 설을 한 번 보자. 조선은 유교 광신 제정 일치 국가로 지나칠 정도로 검소해 '보이고자'하는 외관에 집착했다. 실상은 사치와 타락으로 얼룩진 조선의 왕족과 양반들이였지만 유교의 도리를 논하며 사치를 멀리하는 선비의 모습이 필요해 졌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단청 자제, 다도 쇠락, 상업 지양, 음주가무 음성화, 예술 천시 등.. 조선이 이룩한 결과물들에 의해 기존의 창인들이 설 자리를 잃고 사라져갔다. 즉, 노래를 부를 장소가 달라지게 된것이다. 서양의 성악 창법도 초기에는 얇고 밝고 부드러운 소리 위주의 창법이 주류였고 특히 남자는 소프라노의 맑은 두성을 사용하는 카스트라토가 가장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규모가 커지고 극장이 커지면서 점점 단단하고 크고 우렁찬 소리가 필요해지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흉성 느낌, 어둡고 쩌렁쩌렁한 성악소리가 대세가 된것이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강조하는 예술이 유행을 타면서 음역대도 내려가고, 뮤지컬에는 벨팅 창법이 만들어지는등의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경우도 길 한복판에서 사람 한명이 몇십명의 관객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리니 창법이 점점 무겁고 단단해지고 한의 정서가 강조되고 선비정신이 중시되는 등의 변화로 인해 창법마저 바뀌어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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