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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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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괴 요리 == {{헬보딸}} {{지옥그자체}} {{인용문|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관으로서 북한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인용문|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 군 최고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공군 폭격기사령과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위의 책, 43)}} {{인용문|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사령부의 B-29rl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위의 책, 43~44)}} {{인용문|워싱턴은 미 공군의 북한지역 폭격 시 국경지역 및 민간지역 폭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북한지역을 무차별적으로 대량폭격하고자 하는 세력이 완전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전쟁초기부터 소이탄을 사용한 북한 도시지역 무차별폭격을 주장했다. 오도넬은 맥아더와의 첫만남에서 "북한 내 5개 산업중심지를 불살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전쟁초기 르메이나 오도넬의 주장은 여러 정치적 고려 속에서 묻히고 말았을 뿐이다.(위의 책, 73) }} {{인용문|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사량관들에게 북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지역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의 목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은신처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민간지역의 '사전파괴'였다. 맥아더와 미 극동공군 수뇌부는 추운 겨울 한반도 북부의 민가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림으로써 공산군의 휴식처와 보급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자 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파괴작전의 성공을 위해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본토 공격에서 활용되었던 소이탄 폭격을 지시했다.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폭격은 2차대전 시기 영국공군의 독일 도시폭격이나 미 공군의 일본 본토폭격에 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무차별폭격이었다. 맥아더는 새로운 민간인 거주지역 파괴작전을 '초토화정책'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맥아더의 북한지역 초토화작전 명령이 그를 향한 미 극동공군 장교들의 지속적인 건의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점이다. 초토화 작전을 강력히 건의한 이들은 극동공군사령과 스트레이트메이어,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 폭격기사령관 오도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2차 대전 시기 미군의 극동지역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인물들로서, 전후 전략공군의 확충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었따. 한국전쟁 초기에는 전시민간인보호를 주장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폭격정책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이 위기에 처하자 항공력을 공세적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초토화작전이 시작된 후 북한지역은 그 작전명처럼 완전히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4일 B-29기 수십대의 소이탄 투하는 연일 지속되었다. 1950년 11월 폭격으로만 만포진의 95%, 회령과 남시의 90%, 초산의 85% 강계 희천 삭주의 75%등이 완전파괴되었다. 이 시기 북한지역 폭격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당지역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 투하 후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실시하거나 다양한 시간간격의 시한폭탄을 소이탄과 동시에 투하했다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표현 그대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초토화'를 기도했다.(위의 책,296-297) }} {{인용문|[[희천군|희천]]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도로와 2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가 사라졌다. 건물은 공터 아니면 돌무더기만 남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텅 빈 껍데기로 변했다|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윌리엄 딘]]장군의 회고}} {{인용문|지상군의 후퇴에 따라 극동공군의 초토화작전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남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 조사 사례 중에는 1951년 초 미공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규모 집단희생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1951년 1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원 · 경기 · 경북 · 충북 지역 폭격 피해 사례들은 사실상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중에서도 도진순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깊은 현지조사가 실시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연구논문과 조사보고서, 경북 예천 · 충북 단양 · 경기 · 강원 지역 폭격사건 조사보고서 등은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 확산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하다.(김태우, 폭격, 2013, 326-327) }} {{인용문|남한지역 초토화작전의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술 중 하나는 이 시기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폭기 임무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의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는 "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다른 정찰관 네빌은 "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초, 미공군은 적 점령하의 남한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329-330)}} {{인용문|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은 1951년 초 경기도 [[안양]]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br />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벌의 옷을 부여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있었다.(330)}} 요약하자면 6.25 때 인민군 점령 지역을 네이팜으로 통구이로 만들어 진정한 [[헬조선]] [[지옥불반도]]를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인민군 멀티인 빨치산이 있는 인근지역도 세트로 통구이로 만들어주셨다. 사실 6.25땐 남북한 나눠 서술하는게 무의미하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는 공산당 점령지와 미점령지만 있을 뿐이다. 여튼 한때 토착빨갱이들에게 반미감정의 장작으로 자주 사용되던 떡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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