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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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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백야 [[김좌진]] 장군과 훗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가 될 [[이범석]]의 지휘 아래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하고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청산리 계곡은 긴 계곡이었으며 계곡 주변은 숲으로 험난한 곳이었는데 일본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통해 매복하고 있던 이범석 부대와 한 판 떴다. 얼마 후 본대도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고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기 근처의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과 붙고 있었는데 이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해서 오인사격으로 일본군이 쳐발렸다고 독립군 측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10월 22일 새벽 백야 김좌진 부대의 제1·2지대는 근처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그곳으로 이동해 일본군 기병과 떴다. 백야는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과 떴고 밤이 되자 독립군은 어랑촌 부근의 고지에서 철수했다. 10월 23일부터 일본군 수색대와 여러 교전을 벌이며 상류로 이동핬다. 25일 일본군이 기습했지만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다. 피해는 대한민국 60명 전사. 일제 3000명 이상 사망.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 포위망이 빡세지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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