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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위촉오=== 장강 북부나 난징, 상하이일대, 장강중류지역의 민족들은 죄다 한족화가 진행되었다. 대신 인구가 존나 적었다. 예를들어서 한서 지리지를 보면 [[호북성]]남서부를 꽉잡은 남군에 17개현밖에 안되는 정도에, 장강이남 양주가 너무 막장이라 양주자사부를 장강이북의 수춘에 둘 정도이니 말다했다. 그래도 형주자사부를 후난성 중부인 무릉군 한수현에 두고 한족화된 남양군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ref>마왕퇴무덤에서 이런 문건이 발굴됨.</ref> 등 개척을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개척의 성과인지 당시에도 물자가 꽤나 풍부한 곳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나라때까지는 강(江)이라고 하면 이 장강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후한대부터 강(江)이 보통명사화가 되고 장강(長江)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후한말, [[동탁]]이 낙양성을 불태우고 [[이각]], [[곽사]]패거리가 영천군, 관중지역을 초토화시키고, 기주가 여러세력들에 의해 작살나는등 화북이 씹-헬이 되면서 많은 유랑민들이 장강일대에 정착했다.(물론 장강지역도 군벌들이 깽판을 치면서 막장이 되긴 했지만 화북에 비하면 나은편이었다.)이들덕분인지 후한말쯤되면 강남지방인 양주, 형주, 익주의 현수가 많이 늘어나고 군도 여러개 신설되었다. 위촉오시절, 촉은 익주에서도 사천분지를<ref>조위한테 몇번씩이나 해오던 북벌도 사천개발로 인한 사천의 생산력항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ref>, 오는 형주와 양주를 개간하면서 농업생산력과 인구부양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오력을 했지만, 결국 위나라와 사마씨의 폭동으로 세워진 진나라가 가지고 있던 압도적인 화북의 생산력에 쳐발리고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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