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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이후== 비록 통일전쟁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무력으로 통일해서 그런가 무식한 마오쩌둥은 그걸 가지고 베트남에 존나 지랄했고 그에 따라 점점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게 된 북베트남 지도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에 접근했다. 베트남에 무관심했던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무력 개입하고 베트남이 ㅅㅌㅊ로 저항하자 베트남의 가치를 재평가했고 1965년부터 본격적인 원조에 나섰다. 1964년까지만 해도 중국에 비하여 미미했던 소련의 원조는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중국을 두배 이상으로 압도하였다. 북베트남 역시 외교의 축을 중국에서 소련으로 옮겼고 하노이와 모스크바를 오가는 횟수가 하노이와 베이징을 오가는 횟수보다 훨씬 많았다. 내역을 보면 이해가 가는데, 소련의 원조는 주로 전차와 대포, 미사일, 군함 등 현대식 중화기와 산업 기계류인 반면, 중국의 원조는 고작 식량과 트럭, 소총과 같은 허접한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호치민은 중공 고문단 말만 듣고 대약진 운동을 시행했다가 정권 개십창날 뻔했고 그대로 시행했으면 중공은 아몰랑하고 소련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버리고 난 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먹혔을 것이다. 같은 시각엔 응오딘지엠이 토지개혁이 잘나갔었거든. 시위를 겨우 몰아낸 호치민은 자아비판하고 이때부터 반중성향이 점점 강해진다는 거지. 그 결과 북베트남은 첨단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에게 받은 전차와 전투기로 공군을 창설하고 기갑부대를 편성하는 등 현대적인 군대로 거듭났다.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자 갑자기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공을 부풀리고 중국의 지원을 폄하하기 시작했으며 당연히 통수를 맞은 중국은 심하게 빡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베트남에 비교적 우호적인 류사오치가 몰락하였고 류사오치를 대신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쥔 린바오는 베트남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홍위병들이 베트남으로 향하는 철도를 파괴하고 소련의 원조 물자를 약탈하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실상은 의지 문제보다 중국이 무능력했기에 발생한 일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이 존나 후진 것들만 주고 있다며 온갖 카더라를 퍼뜨리며 불만을 품었다. 전쟁 도중에도 베트남 공산당은 그런 의심을 해서 중국의 조언을 잘 따르지 않기 시작했고 결국 중국의 만류를 무시하고 "구정대공세(뗏 공세Tet Offensive)"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베트콩들은 1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내었고 기대했던 남베트남인들의 봉기도 없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대실패였다. 중국의 조언가들은 북베트남이 적이 충분히 혼란에 빠지기 전에 너무 일찍 공세로 전환했다면서 비판하였다. 근데 북베트남은 엿이나 먹으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양국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중국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평가가 크게 떨어져서 원조도 크게 삭감하였다. 1969년도 원조 금액은 전년에 비하여 20%가 줄었고 1970년에는 50%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북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도 모두 철수하였다. 1969년 9월 2일 친중적이던 호치민이 사망하고 반중파인 레 주언이 주도권을 쥐면서 중국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베트남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중국에서는 친베트남파 세력의 조언을 들어 1971년부터 다시 원조를 대폭 늘렸다. 미국에게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닉슨은 방중 이후 미군의 철수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카더라를 대폭 지지했던 베트남 공산당은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중국이 닉슨을 상대로 베트남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카드로 베트남 문제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 라고 지랄했다. 그래서 니가 뭔데 미국과 우리 문제를 논하냐?고 통수를 때렸다. 당연히 중국 지도부는 역시 제대로 통수를 맞은 셈이니 존나 빡쳤으나 일단은 그래도 북베트남를 달래기 위하여 원조 금액을 대폭 늘렸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72년 2월 21일 하노이 주재 중국 대사관에서 구정 연회를 열고 북베트남 인사들을 초대했지만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체면을 제대로 구긴 중국 지도자들 역시 이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뜬금없이 뻘소리를 지껄이며 남베트남을 즉각 침공하려는 북베트남을 저지했고 남베트남에 대한 통합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해야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북베트남은 중국이 베트남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1973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한 레 주언이 81억 위안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요구했지만 저우언라이는 ㅅㅂ 이 새끼는 제대로 미친건가? 하고 25억 위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중국은 거의 멸망 직전이었다. 반면, 소련은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제공한 10억 달러에 달하는 유상 차관을 탕감해 주었으며 추가로 10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였다. 그러자 북베트남에서는 옛날에 먹은 적이 있는 영토를 가지고 지랄하는 민족주의자들도 나왔으며 중국에 그 영토들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까지 전달되자 중국은 맞불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직접 원조를 제공하였다. 당연히 북베트남은 개빡쳤다. 더구나 마오쩌둥은 농민 새끼라 그런지 중국은 항상 외세의 침략에 놓여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망상하는 병신이었다. 그가 한국전쟁에 무력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중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이 지랄하니까 그 병신은 이제 소련이 베트남을 이용해 자신들을 침공하는 것은 아닌지 망상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태도도 그런 망상병에 불을 질렀다. 양국은 영토에 국경선을 긋는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1974년 8월 통킹만의 해상 경계를 놓고 중국과 북베트남 사이에서 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서로의 주장만 고집하다가 결국 결렬되었다. (베트남에도 양심이 없는 새끼들이 많았다. 걍 일정 지역 중국인들도 사실은 베트남인이라며 지랄하고 다니는 병신들의 영향이 상당했다.) 레 주언은 "베트남은 두개의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기아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반동분자들이다" 라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소련 덕분이라고 칭송하면서 중국의 도움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75년 9월에는 레 주언을 단장으로 하는 베트남 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도 보복조치로 베트남에 있는 자국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켰고 (북베트남에서는 일부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뻘소리로 유혹하기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FUCK이었다.) 모든 경제 협력과 원조를 중단시켰다. 대신 베트남과 대립하고 있던 캄보디아와 경제 협정을 체결하고 10억 달러의 원조를 주었다. 베트남 지도부에서 친중파들은 쫓겨났고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4인방을 제압하면서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농업적 사고가 강했던 베트남에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있던 마오쩌둥 이상으로 베트남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의 도발에 강경 대응을 하기로 했다. 1974년부터 시작된 국경 분쟁은 점점 증가하였고 1975년에는 439회, 1976년에는 986회, 1977년에는 752회에 달했다. 중국은 1978년 한해 동안 베트남이 약 1천회 이상의 무력 도발을 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도 같은 기간 중국이 2천회가 넘는 무력 도발을 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이 화교들을 조질 때 화교들과 협력할 것을 외치기는 했지만 은근히 배신자들로도 보고 있던 중국은 강력히 나서지 않았지만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소련은 중국을 자신의 개로 만들기 위해 베트남에게 대량의 최신 무기를 제공하고 극동 함대의 일부를 남하시켜 베트남과 가까운 공해상에 배치하는 등 대중 포위망을 강화하고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중국은 별로 따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승인하고 상당한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였다. 그러자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사람 1명이 베트남 사람 30명과 맞먹는다며 호기를 부렸지만 기껏해야 중국제 경화기로 무장한 폴 포트의 군대는 소련제 중전차와 미그 전투기, UH-1 헬기, 중포를 앞세운 베트남 군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77년 12월 베트남군 8개 사단 6만명이 국경을 돌파하여 30 km 정도 진격하였다. 민족주의자 캄보디아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했다. 1978년 12월 25일 18개 사단 및 15개 독립 여단, 1개 비행사단 등 20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다시 침공하여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프놈펜을 점령하고 폴 포트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소위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말로는 해방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정복자나 다름없었고 헹 삼린 정권은 사실상 베트남의 괴뢰 정권으로 모든 정책은 베트남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으며 캄보디아 전역에서 "베트남화"가 시행되었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의 반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베트남군은 힘으로 반발을 눌렀지만 결국 1982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89년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위협을 통해 영향력을 투사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베트남이 무력으로 캄보디아를 도발하자 1978년 9월부터 중국 지도부는 베트남에 직간접적으로 경고를 보낸 바가 있었다. 덩샤오핑은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태국 수상과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에게 만약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다면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었다. 물론 베트남 사람들은 민족주의 감정에 의해 중국을 겁쟁이라 조롱하고 있었고 중국이 전쟁을 걸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남아 순방에 이어서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미중 수교를 체결하는 자리에서 카터 대통령에게 경고를 무시한 베트남을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후의 개전과 함께 중국 정부는 "베트남이 그동안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중국 영토를 침범하여 중국 국경수비대원과 국경 주변의 주민들을 습격하였다. 국경수비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온전히 정의의 행동이다" 라고 발표하였다. 베트남 역시 중국이 기습적으로 침략을 개시했으며 "베트남 국민들은 정의의 자위권을 행사하여 침략자들을 단호히 격퇴할 수 밖에 없다" 라고 발표하였다. 서로 자신들이 피해자이며 정의 또한 자신들에게 있다고 국민들에게 알리는 식이었다. 소련의 참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인 중국인들은 만약 소련이 참전한다면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의했고 중국은 1979년 2월 11일에 베트남 침공을 결정했다. 공격일은 2월 17일이었다. 베트남은 4월부터 본격적인 우기에 들어가는데, 중공군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가 없는 상태에 있었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리라는 것은 베트남으로서도 사실만 보자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중국 정부가 존나게도 계속 경고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 지도부는 중국의 침공을 소련이 묵인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이 보기에는 겁쟁이인 중국이 그런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트남이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캄보디아 침공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도 소련을 은근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의지를 과대평가한 반면, 중국의 의지는 과소평가한 셈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능력과 의지를 오판했던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6.25와는 다르게 수도와 거리가 멀어 베트남 침공에 회의를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군인들이나 해양을 더 중시하여 전투 의지가 별로 없었던 군인들도 있었다.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어 땅따먹기에 적극적인 군인들은 문화대혁명 때 상당히 제거된 시점이었다. 또한 베트남은 좆같은 정글 산악지대라 병참에서 매우 열악한 중공군으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정글 지역에 살던 중국인들도 있었지만 애초에 중국 한족들 자체가 정글을 그리 선호하지 않아서 정글 자체를 존나게 개발해서 사는 편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석대로 베트남군에 가장 치명적인 시점에서 공격을 가하기는 했지만 중공군 자체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민병대에게도 질적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무장이든 훈련 상태든 죄다 병신이었다.(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충격적이게도 군대의 훈련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신 교육만 받았다.)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은 3방향에서 국경을 일제히 돌파하였다. 주력은 6개 사단이 투입된 카오방 방면이었다. 그리고 조공으로 랑손과 라오카이 방면에 각각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작전은 어디까지나 지상에 국한되었고 해공군은 초계 외에 직접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지휘관은 용기는 있었으나 밑바닥 출신이라 군사적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던 쉬스여우(许世友) 상장이었다. 이는 문화대혁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군사학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부르게 된다. 중국의 문제점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10년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근대적 교육 혹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군사령관들은 특히 지식인들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어 그들에게 유독 악독했던 양아치 무리들에게 끌려나와 온갖 수모를 당하거나 재기불능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문혁의 여파는 특히 군대의 교육과 훈련을 맡은 군사 학교들에 심한 타격을 입혔다. 중국 전체 125개 군사학교 중에서 82개가 폐쇄되었고 대부분의 교관들이 "반동"으로 몰려서 투옥되거나 쫓겨났다. 이로 인하여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교수진이 붕괴되었고 교육 설비와 기자재, 귀중한 전쟁 자료들도 태반이 불태워지거나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부들은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훈련 또한 정치 사상 교육에만 주력하고 실전 훈련은 거의 하지 못했다. 경제적 파괴에 의해 중국의 무기와 장비 또한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졌다. 카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중국 공군이 보유한 약 5천여대에 달하는 항공기 중에서 4100여대가 전투기였으나 대부분 Mig-15/17/19와 같은 구식 전투기였고 레이더가 없고 적외선 유도 미사일을 장비하지 않아 공중전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공군력에 의한 도움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전차 역시 20년도 더 전에 개발된 T-54/55를 베이스로 한 59식, 69식같은 구식으로 같은 시기 소련은 전자 기기와 무장, 속력에서 훨씬 우수한 Mi-23/25/27 전투기와 T-64/72 전차를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연구개발 능력을 굉장히 상실하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중국 공군이 보유한 가장 최신 전투기는 Mig-21의 카피판인 J-7이었지만 숫자가 80대에 불과했고 베트남 공군은 그 J-7보다 훨씬 우수한 Mig-21bis를 운용하는 등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상급 제대가 하급 제대를 지휘하는데 필수적인 지휘 통신 장비나 기동작전에 필요한 차량 등도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다. 굳이 하드웨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관련 지식을 있는 지휘관들이 부족하여 병참능력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어, 보급을 제대로 수행할 수도 없었다. 최일선 부대는 수십km 후방에 있는 보급소까지 사람과 우마에 의지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식량과 탄약을 부지런히 실어날라야 했다. 중국군의 전반적인 수준은 30여년 전의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때와 다를 것이 없었으며 소프트웨어를 고려하면 오히려 더 퇴보했다. 물론 하드웨어도 막장이었다. 중국 보병의 방탄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심지어 많은 병사들은 야전모조차 지급받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 보병의 주력 무기였던 56식 반자동 보총은 시대에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 반면, 베트남군은 AK-47이나 M-16같은 빠른 연사가 가능한 돌격 소총으로 무장하여 화력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물론 중국 역시 AK-47 소총을 카피한 56식 자동보총이나 56식 반자동보총을 개량한 63식 자동보총이 있었으나 문혁으로 군수산업이 마비되면서 충분한 수량을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중국의 능력상 품질도 상당히 의문이었다. 이에 맞서는 베트남은 수많은 지하 갱도와 참호, 토치카가 구축되었으며 과거 미군과 프랑스군을 괴롭혔던 온갖 부비트랩, 지뢰, 함정 따위가 곳곳 설치된 채 중국의 공격을 기다릴 정도로 악명높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길도 매우 협소하여 전투는 고사하고 부대를 이동하는데도 대단히 불리하였고 중국도 중월전쟁 도중 공격을 가했다가 끔찍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베트남은 비록 민병대였지만 중국보다 더 나은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여 방어선이 상당히 강력하였다. 베트남의 지휘관들은 소련군 군사고문단에 의하여 훈련되었고 소련제 T-54/55/62와 미제 M-48 등 더 나은 전차를 가지고 있어 만약 중국군이 베트남군의 최일선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평야지대로 진출했다면 베트남군 기갑부대에게 괴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또한 베트남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서 막강한 방공망과 해안방어망을 갖추고 있어 중국 해공군이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중국군의 작전 지휘를 맡은 쉬스여우, 양더즈 두 사령관은 군벌내전기부터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베테랑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고 지식도 거의 없었다. 오직 용기만을 발휘하여 사령관이 된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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