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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3중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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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이집트인 통치기 ([[이집트 제21왕조|제21왕조]]; [[타니스 왕조]]) === 신왕국이 끝나가던 [[이집트 제20왕조]] 때부터 이집트는 망해가고 있었으나, [[람세스 11세]] 사후 [[기원전 1077년]]에 20왕조가 단절되면서 그의 장례를 치러준 [[스멘데스 1세]]가 [[이집트 제21왕조]]를 열었으나 파라오의 권위가 이미 쇠퇴했고 국력도 쇠해지면서 지방 통제력도 약해져서 지방 세력들이 명목상으로만 파라오를 받들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21왕조는 하이집트의 타니스를 거점으로 했기 때문에 타니스 왕조라고도 불린다. 상이집트 지역은 이미 신왕국 말기 시절때부터 떨어져나가 사실상 독자 세력을 형성했고, 파라오의 영향권이었던 하이집트에서도 신관들이 횡포를 부렸다. [[스멘데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아메넴니수]], [[프수센네스 1세]], [[아메네모페]] 등의 파라오들은 권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고 딱히 눈에 띄는 치적도 남기지 못했다. 왕실의 재정과 행정능력이 전부 바닥을 치면서 궁전을 새로 짓는데 필요한 석재를 채집할 수 없어서 람세스 2세가 지었던 수도인 피람세스의 폐허에서 돌을 떼어오거나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 못해 반란이 터졌다. 마지막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2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해, 그의 장례식을 집전한 사위 셰숑크 1세가 즉위하여 제22왕조를 개창한다. === 리비아인 통치기 ([[이집트 제22왕조|제22왕조]], [[이집트 제23왕조|제23왕조]], [[이집트 제24왕조|제24왕조]]) === [[기원전 945년]], 1왕조의 [[프수센네스 2세]] 사후 리비아의 추장 [[셰숑크 1세]]가 프수센네스 2세의 사위로서 파라오가 되었다. 이렇게 [[이집트 제22왕조]]가 수립되면서 이집트는 이민족 왕조의 지배기에 접어들었다. 셰숑크 1세는 굉장히 공격적인 외교전술을 펼쳐 가나안 일대를 자주 공격해 다윗과 솔로몬의 재물을 전부 다 털었으며 미약해진 지방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뒤를 이은 오소르콘 1세는 재위기간에 특기할 만한 자연재난이나 재앙이 없었고 35년의 재위기간 동안 파괴된 신전들을 재건축하고 세드 축제를 여는 등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누려 그나마 전성기라 할만 했다. 오소르콘 1세 사후 즉위한 셰숑크 2세의 출신은 상당히 불분명한데 오소르콘 1세의 아들, 시조인 셰숑크 1세의 아들, 아예 다른 귀족 가문 출신 등 온갖 학설이 난무한다. 2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오소르콘 1세의 아들 타켈로트 1세가 즉위했으나 이쪽도 7년만에 사망했고 딱히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타켈로트 1세가 사망한 뒤 즉위한 오소르콘 2세는 즉위 직후에 하르시에세 A(본명은 더 길다. 이집트학에서는 이 사람을 제23왕조의 개창자로 본다)가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그가 죽은 뒤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반란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오소르콘 2세 시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세력을 불린 신아시리아가 진출하면서 국력이 쇠한 이집트는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점차 밀려났다. 오소르콘 2세 사후 후임자인 세숑크 3세 때 그의 사촌인 타켈로트 2세가 셰숑크 3세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제23왕조(제22왕조의 방계)의 2대 파라오에 즉위하여 테베를 중심으로 상이집트 지역을 장악했다. 다시 상하 이집트로 분열되었으나 모래알 같은 지방 통제로 인해 상이집트에서 또 반란이 터지고 페디바스테트가 테베를 점령한 뒤 파라오를 자칭해 상이집트는 2개 세력으로 쪼개졌으나 27년만에 오소르콘 3세에게 통일되었다. 이 당시 하이집트는 셰숑크 4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셰숑크 4세의 뒤를 이은 파미, 셰숑크 5세가 연달아 즉위했으나 상황은 악화를 거듭했고, 특히 셰숑크 5세 시절에는 수많은 부족과 도시들이 독립을 선포했으며 옛 수도라는 큰 상징성이 있던 도시 멤피스마저 리비아 추장들의 꼬임을 받아 떨어져나가 수도인 타니스와 인근 부바스티스를 겨우 다스리는 도시국가 수준이 되어버렸다. 셰숑크 5세 사후 즉위한 오소르콘 4세는 이미 수많은 도시국가들과 소왕국으로 쪼개져버린 하이집트에서도 가장 동쪽의 조그만 영역을 붙든 채 무력하게 있었다. 상이집트를 쥐고 있던 제23왕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오소르콘 3세 이후 타켈로트 3세, 루다멘이 뒤를 이었으나 루다멘 사후에 영역을 크게 상실해 급속도로 쪼그라들었고 루다멘의 뒤를 이은 이니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하면서 제23왕조는 기원전 728년에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한편 하이집트의 서부에 있는 도시 사이스에서는 리비아 출신 군벌인 테프나크트가 등장해 제24왕조를 개창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는데 바로 쿠시 왕국의 왕 피이가 대규모로 군대를 이끌고 침입해왔기 때문. === 누비아인 통치기 ([[이집트 제25왕조|제25왕조]]) === {{검정}} 이렇게 이집트가 대 혼란을 맞던 [[기원전 8세기]]에 급격히 힘을 불린 민족이 있었다. 바로 이집트에게 2천 년 넘게 쳐맞아오던 빵셔틀 [[누비아]]였다. 누비아인이 만든 [[쿠시 왕국]]은 2천 년 넘게 담당일진인 이집트에게 삥을 뜯겨왔으나, 그 담당일진이 좆망하자 그 찐따같던 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격히 힘을 길렀다. [[기원전 774년]], 쿠시의 왕 [[피이]]가 즉위했다. [[기원전 720년대]]에 24왕조의 테프나크트가 쿠시 지역을 공격해오자 쿠시 왕국이 직접 나서 24왕조를 격퇴했고, 오히려 24왕조를 역관광시켜 [[기원전 720년]]에 정복했다. 이후 하이집트까지 쳐들어가 [[기원전 716년]] 22왕조도 멸망시켰다. 이렇게 이집트는 누비아인 즉 흑인들의 통치 아래서 통일되었다. 누비아는 이집트가 수천 년동안 깔보던 민족이었지만, 당시 이집트인들은 분열기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발 아무나 좋으니까 통일이나 좀 해줘'라는 마인드였다. 근데 누비아가 통일을 해줬으니 오랑캐고 오리지날이고 지랄이고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누비아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흑인들의 통치가 [[기원전 664년]]까지 이어졌으나, [[기원전 7세기]]의 중동의 정세가 격변하면서 25왕조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신아시리아 제국]]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바빌로니아, 아람 등을 정복한 이래로 [[아슈르바니팔]] 대제 때까지 세력을 불리면서 이집트를 위협해왔기 때문이다. 아슈르바니팔의 전 전 왕이었던 [[센나케리브]] 때 이집트와 신아시리아 제국은 충돌했다. 이때 아시리아에 대한 방패막이로 [[유다 왕국]]을 내세웠으나, 유다 왕국은 처참하게 깨졌다. 센나케리브의 다음 왕인 [[에사르하돈]] 왕은 이집트까지 진격해 하이집트를 정복했고, 누비아 왕조는 남쪽으로 토꼈다. 이후 아시리아와 이집트는 하이집트 삼각주 지역을 뺏고 뺏기는 관계를 갖게 되었다가, 에사르하돈 다음으로 즉위한 [[아슈르바니팔]]이 이집트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벌여 [[기원전 664년]]에 누비아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후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파괴했고 많은 노예들을 잡아갔다.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를 직접통치하지 않고, [[네코 1세]]라는 허수아비를 앉혀서 간접통치를 했는데 이때 들어선 아시리아의 속국 왕조가 바로 [[이집트 제26왕조]]([[사이스 왕조]])이다. 26왕조부터는 이집트가 외국에 정복되어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것을 [[이집트 말기 왕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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