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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 === 후한은 본디 총합 13개의 주가 있었다. 근데 오나라는 그 중에서 남쪽의 커다란 주 3개가 해당되었다. 국토넓이는 삼국중 가장 넓었으나 인구밀도는 삼국 중 가장 적었다. 물론 인구 자체는 촉나라보다는 많았지만 실제 행정적 통제력은 쥐뿔도 없었다. ㄴ 이건 사실상 이민족정책이 병신인점과 호족권한의 비대성이 짬뽕된 결과다. 이새끼들은 이민족을 그저 가축으로 여겨 사실상 멸망때까지 이민족군대가 나온적이 없고 호족권한의 비대성은 사노비 하나때문에 고위장수들이 전쟁직전까지 가는 꼬라지가 나올정도로 개판이다. * 양주: [[손견]]의 고향이 있는 곳 일대. 지금의 [[안휘성]]남부, [[난징]], [[강소성]]남부, [[강서성]], [[절강성]], [[복건성]]. 단양남부(現 안휘성 휘주), 절강, 복건지역에선 원주민인 산월부족이 여러차례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다. * 형주: 장사지역은 [[손견]]의 임지였다가 손견이 동탁 토벌군으로 자리를 비우자 조정에서 임명한 장사태수가 공석이 되어 손견이 죽게 만든 왕예의 후임으로 [[유표(역적)|유표]]가 접수했는데, 사실 손견이 장사를 찾으려 하다가 뒈짖한것도 아니고 그냥 원술 명령 듣고 유표 치려다가 뒈짖. 어쨌거나 후에 손권이 이 지역을 익양대치로 탈취하여 소유했다. 근데 북부지역은 위나라한테 넘어갔다. 지금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지역. 후베이지역은 위나라와의 메인 전선에 곡창지대였지만 후난지역은 그동안 한나라한테 숙이고 살던 이민족들은 그냥 적당히 자치권을 누렸다. 여기에도 이민족인 무릉만이 살았는데, 오에 정복된 후에도 복종을 거부했고 시도때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후에 진이 건국되고 공격해오니 바로 진나라 편을 든다. * 교주: 오늘날의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와 [[베트남]] 북부~중부 지역.(교주 최남단인 일남은 오늘날의 북부도 아니고 중부 베트남이다) 마치 병주마냥 있으나마나한 주이지만 병주와는 달리 면적은 존나게 넓었다. 한나라 시절에도 최남단이라 통치 역량이 미치기 힘들어서 유능한 이 한두명에게 통치를 맡겼다. 왕망을 피해 내려온 사씨 가문이 대를 이어 살았으며, [[사섭]]을 중심으로 한 사씨 일족들이 통치권을 갖고 있었다. 교주는 동남아시아~인도와의 중계무역으로 번창했는데, 이 이익에 눈독을 들인 손제리가 사섭 사후에 작업질하다 찌에우(조구)부인을 중심으로 베트남 고유 세력의 대규모 반란이 248년에 터진다. 반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서 손제리 사후에는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토착민들이 다시 대규모 반란을 수 차례 일으키고 위나라와 연계하여, 위에서 보낸 교주 자사가 오의 진압군을 역으로 발라버리고 교주를 장악했다. 271년에야 교주를 다시 되찾지만 그로부터 9년 뒤에 오는 멸망했다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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