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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강제개행}} {{진지}} 역사적으로는 실존 인물은 맞다 요세푸스의 기록이 가필논란이 있는것은 맞지만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CE 37~c.100)의 저서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다음과 같은 두개의 기록이 있는데 이 문서중 하나의 문서가 가필 논란이 있는것이다 "…대제사장직에 임명된 아들 아나누스는… 이미 언급된 것처럼 다른 유대인들보다도 범죄자를 엄격하게 심판하는 사두개파 일원이었다. 아나누스는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권한을 행사할 적절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베스도가 이제 죽었고 아나누스는 부임중에 있었다. 따라서 아나누스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혹은 그의 동료들)을 산헤들린 앞에 세우고 율법 위반자로 그들을 고소하여 돌로 쳐죽이도록 보냈다 예루살렘 시민들 중 공평하고 율법 위반을 불쾌하 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나누스가 행한 일을 혐오 스럽게 생각했다…(『유대인 고대사』, 20, 199-203" 이 기록을 놓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는 주장이 존재하는데, 유대고대사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동명이인은 총 13명이다. 당시의 어법은 인물의 이름 앞에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지역이나 가족을 소개하는 방법을 많이 썼는데, 야고보를 소개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확실한 것은 유명인사인 예수의 이름으로 수식하는 것이었고, 동명이인의 예수 중 나사렛 예수를 수식하기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라 불리우는'이란 표현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적혀진 것이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면 아마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제' 혹은 '그리스도의 형제'라고적었을것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구절이 예수의 신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 가필의 실익이 없다 이걸로 인해 가필의 가능성은 더욱 없을것이다 하지만 다음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라비우스 증언이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본시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글을 신뢰하고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라고 보았으나 시간이 흐른 후 이 글 속에는 가필과 의도적 변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기록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근거는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바리사이적 유대주의에 충실했던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였다고 말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 둘째, 오리게네스가 그의 글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 점 셋째, 예수에 대한 이 기록은 전체 문맥의 흐름에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며 문장이 요세푸스의 문장이나 술어 등에 보이는 독특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요세푸스는 분명히 기독신자가 아니었으나 그의 글 속에는 오직 기독교인만이 진지하게 사용 할 수 있는 독특한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좋아하는 역사가로, 그에 비해 예수에 대한 기록은 지나치게 간략하다 넷째,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이 이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인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유세비우스는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에서 "아마도 우리의 구세주에 관해 내가 이미 만들어 낸 증언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 더하여, 유대인 요셉푸스를 추가적인 증인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점 허나 전체가 가필되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첫째, 문맥, 즉 글쓴이의 입장이 일관되지 못하다. '현자' '놀라운일' '족속(단체의 비하표현)'등은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객관적 표현이나, '그리스도였다' '그의 진리를...' 및 '부활에 관한 확언' 등은 기독교의 입장이다. 즉, 두 사람 이상이(요세푸스 + 기독교인) 글에 손 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빌라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랍비자료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지운다. 셋째, 오리게네스는 그의 책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요세푸스가 믿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내용이다 초기교회 내 에서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떠한 신인가' 라는 것이었으며,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주로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졌다 오리게네스 역시 예수의 '실존'보다는 예수의 '신격'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리겐이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을까? 요세푸스와 예수를 연관지은 것으로 보아 오리게네스가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틀림없이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었으므로 오리게네스는 요세푸스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밝혔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에 대해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의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기독교의 변호인이었다. 예수의 신성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알렸던 그가 기독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언급인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가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었다.'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더라도, 당시에 요세푸스의 중립적인 기록을 두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짓는 사소한 논쟁이 오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적은 원본에 예수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기록인용 시기가 늦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교회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존재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았으므로 요세푸스가 당초에 적었을 예수에 대한 중립적 구절은 인용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의 신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및 '다시 살아났다.'는 구절을 가필함으로써 주장자의 논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세비우스의 발언 또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시에도 역사서를 가필하는 것은 비판받을만한 행동이었는데, 이러한 내용을 순순히 떠벌릴리가 없으므로. 다섯째, 기록이 왜 이리 간략한가? 먼저 당시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관심 밖에 있던 인물은 과감히 기록에서 제외하였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세례자 요한은 필론과 사도 파울로스, 랍비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의의 스승은 쿰란문서에만 나오고 힐렐학파의 창시자인 랍비 힐렐도 바리사이파였던 요세푸스에 의해 언급된 바가 없다 역시 디오 카시우스는 유대의 반로마 저항운동에 대한 기록에서 메시아적 지도자인 바르 코흐바에 대해 아무른 언급을 하지 않고 지나친다 요세푸스는 유대의 배신자였다 66-74년의 유대-로마간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다른 동료들이 자살하는 대신 요세푸스는 항복하여 로마의 옹호자가 된다 자신의 책을 통해 변명을 할 필요도 있었던 그였기에 요세푸스는 유대-로마간의 항쟁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유대전쟁사'를 쓰기도 하였다 세례요한의 경우 헤롯의 결혼문제로 시비를 걸기까지 하는 등 로마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요세푸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를 통해 이집트의 거짓예언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가 올리브산에 3만명을 집결시켜 자신의 무장추종세력과 함께 예루살렘에 진입하여 로마군을 몰아내려하다가 총독 펠릭스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대참사가 벌어진다는 내용이다 즉, 대로마 항쟁에 관심이 있었던 요세푸스에게 황제에게도 세금을 바치라고 했던,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는 관심 밖이었다. 여섯째, 10세기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인 아가피우스가 이슬람과 논쟁하면서 인용하였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요세푸스는... 말한다... 이 시기에 예수라 하는 현자가 있었는데, 그는 품행이 선했으며, 덕(혹은 학식)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 사람들도 제자로 삼았다.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내려 죽게 했지만 그의 제자였던 사람들은 그 제자됨(혹은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고, 그가 자신들에게 십자가 처형 후 사흘째 되던 날 살아서 다시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그는 아마 메시아이며, 선지자들도 그에 대해서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다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는 놀랍게도 학자들에 의해 가필로 추정되고 있는 부분 중 상당수가 보이지 않는다 가필한 부분까지 인용을 해야만 주장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달랑 위의 구절만 인용한 것이다 아가피우스가 이 자료를 어디서 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아마 가필이 비교적 덜 진행된 요세푸스의 사본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인기 있는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사본들은 그 수가 많았을 것이고 누군가가 가필을 했다면 로마와 그리스까지 퍼져 있던 그의 사본들을 모조리 가필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 결론은 전체가 가필되었다고 보기에는 위와 같은 증거들이 존재하며 가필이 없었다고 보기에는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의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 기록이 부분 가필되었거나 개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예수에 대해 비관적인 유태인 신학자 마이어도 동의하고 있다 이 글을 수정할때 마치 아예 전체가필된것처럼 말하는경우가 보이는데,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복음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면 복음서가 왜곡되고 초현실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고 역사적 사료로 인정못받을것이면 이집트 기록 중에 유명한 투트모스 3세의 카르나크 비문을 보면 아문신이 파라오의 군대의 앞장을 서며 팔을 뻗어 그들을 돕는다는 표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다른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학계에서 엄연한 고대 사료로 인정받는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또 '종교적 목적'에서 쓰여진게 문제라면 고대 근동 왕조들의 수많은 기록 비문도 똑같이 문제가 된다 그 기준이라면 아테네를 비판하려는 목적이 강한 투키디데스의 저작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쓴거라 문제가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것은 신화가 신화 자체나 그로 인해 얻어지는 어떤 정당성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당대의 사상을 반증해주는 것임을 인정하듯 복음서를 사료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억지 논리는 그만하여야 한다 복음서 그 자체를 받아들이라는게 아니라 비평적인 입장에서 보면서 역사적 사료로 쓰라는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해보자면 만약 예수님께서 가상의 인물이었다면 어째서 그때당시 유대인들은 간단하게 기독교인들한테 반발할때 "ㅇ? 그런 사람은 처형당한적 없었는데?" 간단하게 이 소리하면 게임끝인것을 어째서 유대인들은 굳이 "예수님께선 십자가에 묵여죽은 범죄자다!!" 이러거나 "목수의 아들으로 태어나고 자란걸 어릴때부터 봤 는데 무슨 신의 아들이냐!!" 어째서 이런식으로 말했을까 정말 예수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그런 사람 없었다~" 이러면서 기독교인들한테 간단하게 반박하고 두고두고 까였을텐데 현실은 전혀 그러지 않았지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라고 까거나 평생 목수일만 한 목수아들이 무슨 신의 아들이냐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사형수라는 점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큰 증거가 된 셈이다 정말 예수가 가상의 인물이였고 제자들이 설정 짠거였다면 굳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라는 이렇게 위험한 설정을 깔수가 없다 잘못했다가는 바로 걸릴텐데 그리고 꼭 이렇게 들킬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설정의 가상의 인물을 만들필요가 없다 가깝게만 봐도 베드로가 있고, 성인취급받는 세레자 요한도 얼마든지있다 결론은 누가 예수를 무엇을 어떻게 왜 까든지 상관없다 다만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던 인물이라고 해서 성경에 나온 이야기가 다 사실인 것은 아니다. 그냥 우리나라로 치자면 삼국유사 같은 야설(야시꾸리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사사로이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를 뜻함.) 정도? === 족보 === Matthew(마태)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와 Luke(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가 다른데, [[메시아]]교(Christ, [[그리스도]]교, 기독교) 신도들은 Luke가 기록한 족보가 마리아의 족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야곱의 아들 열두형제 중 레위의 자손으로 예수의 족보는 레위가 아닌 그 형제 유다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마리아의 족보라는 설명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야매설명이다. ㄴ병신아 마리아는 족보에 안나온다 요셉이 나왔지 근데 자기아들 아님 ㅎ 지쟈스의 가장 독실한 쫄따구들도 하는 말이 이렇게 다르냐 설정을 짜려면 제대로 말을 맞춰서 짜던지 이건 이도 저도 아니고 ㅉㅉ 동네 초딩새끼들도 구라치려면 말을 맞추고 시작하는데.. === 출생 ===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고 아직 섹스도 하지 않았었다.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잉태한지 6달째에, 마리아가 개꿈을 꾸고 엘리사벳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친정으로 가서 석달이나 있다가 오더니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다. 요셉으로서는 어이가 없고 황당할 노릇이다. 요셉이 파혼하려고 고민하다가 잠들던 차에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가브리엘(성경)|누군가 속삭이는 개소리]]에 세뇌당해 그만 마리아를 집에 들여오기로 한다. 호구새끼 ㅉㅉ 걍 줘패서 죽였으면 착한 죽임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비슷한 사례로 고대 그리스에서 여자가 갑자기 임신해와서는 제우스 신의 아기를 가졌다고 변명한 사례들이 있다^^ 입이 가벼운 요셉은 출생의 비밀을 마태, 루카에게 말해주었다.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온지 몇달 후 세례요한이 출생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재위기간중(B.C. 27년 ~ A.D. 14년)에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이 B.C. 4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90522&cid=50762&categoryId=51387]에 인구조사를 실시했다.<ref>출산 시기를 9~11달로 잡는다면, 예수는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후 4~8달 뒤에, 헤롯이 죽은 B.C. 4년 이전에 태어났다.</ref> 뒤끝있는 요셉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인구조사를 받으러가는 힘든여정에도 중간에 마굿간에서 마리아와 섹스 한 번 하지 않았다. 결혼한 뒤 예수를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단 한번도 섹스하지 못한 것이다. 씨발 이럴거면 결혼 왜했냐? ㄴ여러분 결혼은 X스를 위해서 하는게 아닙니다 - [[침착맨]] === 어린시절 === 예수의 나이 12세 당시에 예루살렘의 성전에 있다가 어머니에게 한 말, {{인용문|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3장 49절}} 즉, 요셉이 아닌 야훼를 아버지라 지칭하고 있다.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은 예수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에게 애비없는 자식이라고 놀림당했을 것이 분명하다.(멀쩡히 계신 아버지를 두고?!!) 마리아는 좌절하는 예수에게 느이 생부가 사실은 성령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야훼님께서 생부임을 알린 것이다. 이는 최초로 예수님께서 야훼님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게된 사건이다. 야훼는 원래 유대의 신인데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유대인들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ㄴ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게 된 계기는 이것보다도 예수가 자신들과 적대했다는 사실과 성전정화가 가장 컸다. 애초에 당시에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많아서 그것 자체가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예수의 세력이 다른 메시자 자칭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지고, 자신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자 빡돌던 차에 성전 정화를 꼬투리 잡아 그를 처형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세레요한과 예수의 출생, 예수의 소년시절의 총명함만을 적어놓고 13세 ~ 30세 사이의 행적을 생략하여 바로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이후 3년간의 불나방같은 삶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생략된 13세 ~ 30세 사이의 행적에 대해 전해지는 바는 없고, 오직 몇몇 소설들에 의해 창작되었을 뿐이다. 저 시기에 도대체 뭘 했길래 갑자기 개쎄진건지는 비밀이라 안알랴준듯 30세까지 (의붓)아버지 일 도왔다는 찌라시만 있다. 아내가 어디서 떡쳐서 낳아온 애인지도 모르는데 30세까지 백수처럼 사는걸 보면서 과연 저위인이 진짜 구세주일까 미심쩍었을텐데 꾹 참은 요셉의 인성이 돋보이는 부분 후에 병든사람들 치료해줬다는거 봐서 의술을 공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면 훗날의 성전 정화를 위해 틈틈히 벌크업 했을지도 모른다. ㄴ이를 종합해보면 물리치료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도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왔다는 설이 한때 인기있었는데 그건 개독만큼 질나쁜 놈들이 만든 개구라니깐 믿지마. 한편 영국에서는 이시기에 영국으로 와서 드루이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국뽕 전설을 믿는 모양이다. 인도든 영국이든 간에 당시 기준으로 너무 멀고 굳이 갈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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