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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권 초~무오사화 == {{의외}} {{진실}} 후반에 막나가서 그렇지 세자 시절이나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절엔 의외로 잘했다. 솔까 초기에는 꽤 잘했네?싶게 통치력도 있었는데,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리자 구휼미를 풀었다. 또한 여진족들과 왜구 막으려고 금산조치<ref>조선시대에 배나 무기를 만들려고 아무 것도 못 하게 산에다 막아놓은것</ref> 를 확대시키기도 했다. 씹선비와 대간들 목 친건 나쁜짓이 아니라 잘한 짓이다.<ref>[[성종]]이 대간들을 너무나 많이 키워놔서 이새끼들이 지가 왕인줄 알고 나대다가 대신들한테 찍혔다.</ref> 그리고 통치력이 없는 놈이었다면 이때 진작 모가지 날라갔다. 유능한 점은 있었지만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서 하면 안될짓을 저질러 버린거라고 요약할수 있다. 연산 초기의 정치는 대간과 연산군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요약 가능함. 성종 때 경연정치를 활성화시키겠답시고 대간세력을 너무나 크게 키운 나머지, 성종 말년에는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을 시시콜콜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대간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던 성종마저 화를 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함. 한 예로, 연못과 수통을 연결하는 재료를 구리로 쓰려 했다가 그게 사치라고 대간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바람에 성종도 처음에는 저항했다가 대간이 끝까지 지랄병을 해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로 바꾸고, 구리를 철거하고 돌로 바꾸는 과정에서 애먼 담장을 몇개 헐어내야 했으며, 이에 빡친 성종이 승지에게 "지금 안 없애면 나중에 또 이거가지고 사치한다고 지랄할꺼니까 가지고가서 부숴라" 라고 화를 내는 일도 있었음. 아무튼 이런 대간세력이 강성해서 대신마저 눈치를 보는 상황에 새로운 임금 연산군이 즉위 했으니, 대간은 당연히 현행대로 유지되기를 원했겠지만, 연산은 애초에 그런 유형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종처럼 정통성이 매우 취약해서 신하들의 지지를 막 얻어야 할 이유도 그다지 없었음. 애초에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라 정통성 면에서는 전혀 꿀릴 거 없었음. 근데 대간은 그런 임금의 심리는 안중에도 없고 즉위하자마자 연산이 하는 일에 계속 태클을 걸고 나서고, 즉위 초의 연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갑자사화 이후의 난폭한 연산은 아니라 어느정도는 받아 넘겨주고, 심한처벌도 별로 내리지 않음. 하지만 사실 기록을 살펴보면 대간의 태클중에서 좀 심하다 싶은걸 빼고는 전부 명분이 있는 말이고, 대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임. 애초에 유교,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국가에서는 신하는 반드시 국왕에게 충성해야 하지만, 반대로 신하는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 이 상반되는 두 사실이 충돌하는게 곧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는 거고, 조선 초기의 역사는 이 두개의 권력이 충돌하는 역사임. 왜냐하면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난 이후로는 연산군이 반면교사가 되어 조선왕조가 문을 닫을 때 까지 이전처럼 왕권이 강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 오히려 나중가면 신하들의 권력이 너무 세져서 이게 시발 왕이 바지사장아니냐 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연산은 즉위하자마자 대간이랑 충돌했는데 성종의 수륙재를 지내는 거로 싸움. 수륙재란 영혼을 위무하는 불교식 행사인데 조선이 숭유억불 국가임에도 불교식 전통은 남아 있어서 수륙재는 선왕이 훙하면 그 다음 왕이 관례적으로 수륙재를 지내왔음. 애초에 태조 이성계는 독실하다시피 할 정도의 불교 숭상을 했고, 세종도 말년에는 불교를 믿었으며, 세조는 아예 대놓고 자기가 호불의 군주다 라면서 대놓고 불경 간행하고 그랬으니까. 태종도 불교를 억누르긴 했지만 솔직히 현실적으로 백성들의 신앙을 하루아침에 싸그리 없애는 것도 말이 안되니만큼 사원 수도 싹 줄이고 교파도 정리하고 도첩제를 실시했어도 대놓고 불교 믿는걸 금지할 순 없었음. 하지만 연산군의 선왕인 성종은 그 이전의 어느 왕보다도 불교를 더 억제시킨 군주임. 말년에는 금승법을 통과시켜 중이 되는 걸 막기도 했고, 과거시험장에서 불교를 숭상해야 한다고 했던 유생의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한 처벌을 내린적도 있고, 신하들에게 내가 불교 싫어하는건 느그들이 더 잘 알지 않냐라는 말을 한 기록도 있음. 그래서 연산군이 성종의 수륙재를 지내려 했을 때 대간이 했던 가장 주요한 주장이 성종은 불교를 싫어했던 군주인데 부왕의 뜻을 거스르고 수륙재를 지내려 하느냐 였음. 하지만 연산군의 한결같은 입장은 선대 왕들도 다 했었고, 성종도 예종을 위해서 수륙재를 지냈으니까 나도 하겠다 였음. 사실 이것도 맞는말인게 왕조사회에서 선례라는 건 매우 중요한 교본임. 이전 왕들도 똑같기 해왔기 때문에 나도 하겠다 라는건 상당히 타당성 있는 거고 왜 그런걸 내 시대에 와서 갑작스럽게 제도를 바꾸려 하느냐 라고 했을 때 사실 이거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기는 대간으로서도 어려움. 실제로 성종도 예종이 훙하고 수륙재를 치룬 일이 있기 때문. 다만 이건 성종이 어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을 때라 사실상 대신들과 대비의 의견으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선례에 따라 일을 수행했다는 좋은 예시임. 성종이 나중에 수륙재를 금하라 라는 명을 내린적이 있었는데, 이건 왕실의 행사를 금하라는게 아니라 당시 안행량에서 조운선이 자주 침몰해서 그 지역에서 그 혼들을 위무하는 수륙재를 지내왔었는데 성종은 이걸 금하라 한 거여서 이거에는 해당이 안됨. 반면 대간은 이와 달리, 부왕의 뜻을 강조했는데, 이게 존나 골치아픈게 연산군의 말과 대간의 말이 둘다 옳아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가 애매함. 대간의 말대로 성리학적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왕실이 대놓고 불교행사를 하는게 타당하냐, 성종은 불교를 싫어했는데 감히 부왕의 뜻을 거슬러 성종의 혼을 불편하게 하느냐 라는 말도 맞고, 연산의 말대로 선례를 따르겠다라는 말도 맞음. 그래서 연산이 일관되게 수륙재를 지내겠다고 했음에도 대간은 몇개월에 걸쳐 반대상소를 올림. 나중에는 성균관 유생들마저 대궐 앞에 몰려와서 상소를 올리는데 나중에 가면 이 상소의 내용이 문제가 됨. 이 시기 유생들의 생각은 무조건 닥치고 직언, 직언하다 화를 당하면 곧 그게 참선비다 라는 이상한 마인드가 있어서 할 소리 안할 소리 분간을 못하고 씨부리는 걸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일례로 이 당시 유생들이 올린 글에는 대놓고 세조가 불교를 숭상한 것을 마구 까대는 대목이 있어서 연산이 처벌한 적도 있음.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세조가 불교를 믿은 탓에 역신이 횡행하고 불교를 숭상하는 무리들이 넘쳐난다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의 승자는 연산. 결국 수륙재 지냄. 대신들은 대간과는 달리 어느정도 연산군의 편에 서서 대간의 지랄발광을 어느정도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했는데, 대간은 이게 또 불편해서 대신 중에서도 연산의 의중에 잘 따라주었던 노사신을 소인배라고 단체로 빼애액거리며 공격을 해대서 연산이 들어주지 않자 급기야 집단사직으로 맞서기까지 함. 이미 이 수법은 성종 때 임사홍을 소인배라고 단체로 빼애액 거리며 지랄했다가 성종이 마침내 수용을 해서 임사홍을 내치자 이걸 생각하고 연산군에게도 비슷한 행동을 한 것같은데, 애초에 연산은 대간 과의 대치선을 분명히 한 임금이라 들어줄 생각 1도 없고 오히려 대신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기까지 함. 근데 대간은 그런거 없고 닥치고 들어줄 때까지 빼애액에 집단사직이라 연산군이 복직을 명해도 사직이라 복직 사직이 무한반복됨. 연산 입장에서는 ㅈ같은데 그렇다고 대간을 탄압하면 언로를 막으면 안된다 명분이 있는지라 대놓고 그러지도 못하고 참기만 함. 실제로 연산초기 대신들 중에서 누구보다 연산의 의중에 잘 따랐던 사람이 노사신인데, 역시나 대간은 노사신은 소인배다하면서 줄기차게 물어뜯음. 근데 아이러니한건 정작 무오사화가 발생해서 많은 사림들, 특히 대간의 직책에 있던 사림들이 대거 벌을 받게 되자 처벌이 너무 과하다라고 하면서 사건을 어떻게든 축소시켜서 최대한 연루자를 줄이려고 고군분투한게 노사신임 ㅋㅋㅋ 다만 무조건 안 들어준 건 아니고, 어느정도 들어줄 수 있는 건 버티다가 대간의 요구를 수용해주기도 함. 확실한건, 이 시기까지 대간은 연산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존재였음. 위에서도 말했듯 성리학적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대간의 활동은 필수적이고, 게다가 전 왕인 성종은 자의든 타의든 이걸 실천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기 때문에 대간이 성종때의 질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건 당연한 거고, 당연히 그 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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