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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역시 [[나치 독일]]의 땅크 군단과 싸운 저력 덕분에 육군은 짱짱이였다. 2차 대전 말기 기준으로 500여개 보병사단과 50여개 전차군단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총전력은 천만명을 넘었다. 전력이 많은 덕분에 공업력 버프를 얻어 [[T-34]]를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으며 [[우라 돌격]]과 기갑 웨이브를 쓸수 있게 되었다 1955년, 게오르기 주코프가 국방부장 직위를 맡으면서 핵전쟁 상황 속에서 재래식 병력의 생존은 기동성에 걸려있다고 판단, 알보병들을 전부 차량화, 기계화해버리는 비범한 개혁을 실행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러샤 곤뇽에는 순수 알보병 제대가 존재 하지 않는다. 전부 다 전차 끼고 장갑차 타도 댕기는 기동제대들 뿐. 알보병 편제가 없었기 때문에, 우라돌격? 냉전기 소련군에게는 그런거 없다. 떼칠이가 보우하는 땅끼 러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근데 냉전기 가서야 서방군에게 전력이 밀리기 시작했고 이 영향 덕분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ㄴ냉전기에 들어서면서 서방측에 비해 육군이 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80년대에 와서야 슬슬 질적 차이가 벌어진거지. 3차 세계대전 발발시, 주독소련군을 선봉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갑집단을 유럽에 쏟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뭐 소련군의 후방지원체계가 그다지 좋았다고 보긴 어려웠다보니 그러한 기갑집단의 충격으로 달성한 전과가 장기간 유지 및 확장 될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소련군 수뇌부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단기간에 기갑집단의 충격으로 하여금 작전술적 성과를 거두고, 나아가 이것이 전략적 성공, 즉 승리로 이어지도록 하는것에 중점을 두었다. 현 북한군의 대남 교리도 이것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수 있다. 아무튼 나토군은 유사시 저러한 소련의 기갑집단이 서유럽으로 돌파해 들어와 깽판을 치는것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산물이 M270 MLRS나 아파치 헬리콥터와 서방 3세대 전차, 그리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운용되던 전술핵이었으며, 걸프전에서 반짝 빛을 발했던 공지전 교리나, 과거 만슈타인 아저씨가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선보였던 기동 방어를 도입하는등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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