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삼국시대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역사 == {{진지}}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사회에는 [[철기 시대|철기문화]]가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강되었고, 새로운 전술인 [[기병]]전(騎兵戰)의 등장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안으로는 인접한 정치세력 간의 통합이 촉진되고, 밖으로는 [[요동]]군·현도군·낙랑군·대방군 등 [[중국]]의 식민지 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 왕권이 성립되고 그 지배력도 강화되어 갔다. [[고구려]]가 성장한 동가강(佟佳江) 유역과 압록강 중류 지역인 통구(通溝) 일대는 가장 먼저 정치세력이 성장하여, 이미 [[위만조선]] 때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세력이 성립되었던 지역이다. 또, 서기전 82년에는 이 지방의 지배세력이 현도군을 몰아내어, [[한나라|한(漢)나라]]는 서기전 75년 현도군을 요동지방의 흥경(興京)노성(老城) 방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 요충 지대에서 성장한 고구려는 태조왕(53∼145) 때 [[동해]]안 지역에 진출하고 청천강 상류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계속해서 요동지방을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이같은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5부에 대한 국왕의 지배권을 상당 부분 확립하고 책구루(幘溝漊)를 설치하여 한의 정치 경제적 간섭을 차단함으로써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통구를 잃은 한나라는 서안평(西安平 : 지금의 鳳凰城)에서 압록강 하류를 건너 낙랑군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였다. 신대왕은 다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는 등 교통로를 위협하더니, 311년(미천왕 12) 서안평을 확보하고, 313년에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북방에서 중국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 그 세력을 구축하며 성장해 나갔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약 100년 늦은 고이왕(234·285) 때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백제의 성장에 위협을 받게 된 낙랑군은 맥인(貊人 : 동예 세력으로 추정)과 함께 백제를 자주 침입하였고 책계왕을 죽였으며, [[암살|자객]]을 보내 낙랑군의 변경을 빼앗은 분서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백제 역시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세력과의 힘든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신라]]는 왕호로 볼 때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시기에 이어 연장자인 연맹장을 뜻하는 이사금(尼師今) 시기를 지나 대수장을 의미하는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이르러 고대왕국을 이루었다. 진한의 한 지역국가에 불과했던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은 3세기 초부터 [[가야]] 등 주변 세력들과 대항하는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낙랑군과 연결된 종족들, 가야와 가야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일본|왜(倭)]], [[한강]] 상류 지역을 개척하고 있던 백제 등과 자주 충돌하면서 성장하였다. 신라 고대왕권의 성립은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356·401)때의 일로, 고구려보다 약 200년, 백제보다 약 100년이 늦다. 신라는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계속되어 이들이 신라에 미치는 압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고대국가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고구려는 낙랑군을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식민지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4세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족(漢族)의 세력이 중원에서 약화되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강력한 정복국가를 형성하여 이들의 정복 사업은 고구려에까지 그 손길을 뻗쳐 왔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342년(고국원왕 12) 연(燕)의 침략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고, 371년에는 이러한 위기를 틈탄 백제의 북진을 막으려다 왕이 [[평양]]에서 전사하는 불운을 맞았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남북 양면에서 큰 압력을 받았으나 370년 연나라를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친교를 맺으면서 일단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안정 구축과 더불어 내치에 힘을 써 [[소수림왕|태학(太學)을 세우고 율령을 공포하며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안팎으로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비된 힘을 바탕으로 [[광개토대왕]] 때는 요동을 확보하고 한때 요서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장수왕]]대에 이르러서는 475년(장수왕 63)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하고 아산만과 죽령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중국이 [[위진남북조|남북조(南北朝)]]로 분열되어 있는 동안 고구려는 북조의 [[선비족|위(魏)]]와, 백제는 남조의 송(宋)·양(梁) 등과 연결되어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북위·고구려·신라를 연결하는 세력과 송·백제·왜의 연결 세력이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삼국의 관계사는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2) 때부터 장수왕(413∼491)·문자명왕(492∼518) 때까지의 약 130년간으로, 이 때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펴 삼국 관계를 좌우하던 시기이다. 제2기는 후발 세력이었던 신라가 큰 발전을 이룬 법흥왕(514∼529)·진흥왕(540∼575) 때의 약 60년간이다. 신라는 [[돌궐|돌궐족]]의 침략을 방어하느라 고구려의 군사력이 북서 지역에 집중된 틈을 타서 백제와 더불어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고, 이어 백제를 쳐서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남양만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해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어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함경남도 이원(利原)까지 진출하였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지역을 완전 병합하였다. 이에 신라의 국력은 백제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3기는 [[수나라|수(隋)]]가 589년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때부터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수 왕조는 통일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먼저 고구려와 돌궐족(突厥族)의 연합 세력이 가해 오는 압력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경계가 되었던 요하(遼河) 선에서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수당 전쟁|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이 7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파동은 한강 유역에까지 미쳐 신라·백제·고구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였다. 그러다가 신라가 당과의 외교에 성공하여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