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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시대=== 센고쿠시대 시마즈 세력은 큐슈 남단에서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북큐슈까지 노릴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렸다. 이에 당시 북큐슈의 지방 중 하나인 분고의 다이묘인 오토모 가문은 시마즈 가문의 이러한 기세에 오줌을 지리고 본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SOS를 치게 되는데, 당시 본토를 거의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기회에 큐슈의 지방충들을 제압하기 위해 SOS요청에 호응한다. 따라서 시마즈는 도요토미와 대결하게 되는데, 시마즈는 분전했지만 도요토미의 크고 아름다운 물량을 막아내지 못하고 GG치게 된다. 도요토미는 시마즈를 쳐바르긴 했지만, 시마즈 가문의 포텐을 알아보고 시마즈 가문에 사츠마와 오오시마의 두개 국의 통치권을 주고 자신의 측근으로 영입한다. 그에 따라 시마즈 가문은 도요토미의 측근들만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임진왜란에 4군 선봉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도요토미님의 응딩이맛을 잊지 못하고 서군으로 참여했지만 소극적으로 참여한 덕에 원래 영지의 통치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대로 인정받는다. 사실 이를 두고 도쿠가와는 내심 뒷통수가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뒈질때도 사츠마 쪽을 향하게 묻어달라고 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사츠마는 에도시대에도 강력한 번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사츠마는 17세기 초반에 석고가 60만석(1석=1인으로 치므로 인구도 대략 그정도이다.)이었으나 류큐를 정벌하고 류큐를 속국으로 삼음에 따라 류큐의 석고 12만석을 추가하며 72만석의 국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18세기 전성기에는 석고가 86만석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거품경제가 꺼지자 사츠마도 상태가 병신이 된다. 오죽하면 덕정령까지 발동했다. 덕정령이 뭐냐면 마을 한복판에서 상인들이 구매한 사츠마 채권을 회수하여 그 채권을 보유했던 상인들이 보는 앞에서 채권을 불로 태워버리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꺼지지 않았는데 이는 사츠마 지역에 유난히 식충이 사무라이들이 많았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이러한 병신같은 상태는 19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나 11대 번주인 시마즈 타다요시가 번주가 되어 재정개혁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다시 막강한 번으로 날아오르게 된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갓양의 우수성을 일찌기 깨닫고 서양식 공장을 사츠마에 건설하였다. 그리고 견사산업을 육성하여 이를 재정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츠마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특산품 중 하나인 설탕 시장 에서 일본 국내유통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오사카 상인들을 내쫓고 번의 전매화를 추진하면서 여기서 또 막대한 돈을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개혁으로 빚을 거의 털어내고 재정자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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