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부동산 투기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60~70년대 === 거의 손을 안댔는지, 한강다리를 건너 노량진으로 우회하거나 광진구에 있던 광나루를 많이 썼다고 한다. 갑자기 1963년 서울 면적이 2배로 뻥튀기가 되었는 것은 뭔가 의심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긴 하다만.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가 두배씩이나 되기 시작했다. 진짜 60년대초엔 서울인구가 300만이었는데, 70년대쯤 되선 600만으로 인구가 폭증했다. 그러다보니 안그래도 당시 서울이 살기가 영 좋지 않았는데 더 살기가 어려워져 헬서울 그자체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때문에 서울시민들의 생활수준향상, 인구분산을 위해 다른 지역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됬고. 거기다 1968년 김신조가 [[반인반신]]을 죽이려 들지를 않나, 천조국함선이 북괴에게 납치가 되질않나, 거기다가 1964년쯤엔 울진, 삼척에 북괴가 무장공비를 보내서 양민들을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 결과 안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게 됬는데, 강북에만 빙빙도니까 서울의 안보가 너무 취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셋째로, [[반인반신]]이 1963년에 선거로 대통령이 됬든 말든 정치권력을 얻게된게 쿠데타였는지라, 정치적 정당성이 매우 씹창이었다. 그래서 정당성을 어떻게든 매우기 위해서그는 경제성장을 카드로 내세웠다. 마치 북괴 [[김일성|혹부리]]가 이밥과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얻게 된것처럼 말이다. 그 결과 '이렇게 된 이상 강남을 개발한다' 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서울시장 김현옥이 의욕적으로 강남개발을 시행했다. 그가 1966년 광복절까지 어거지로 (날 맞춘다고 어거지로 짠 부분이 있다고 한다.) 서울 기본개발안을 제시했다. 이때 처음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한 곳이 지금의 서초구 북동부와 강남구 북부인 '영동지구'였다. 거기에다 [[반인반신]]이 아주 굳은 의지로 [[경부고속도로]]를 세우는데,(그 공사에 현역병이 동원됬다고 한다. 지금 북괴가 군인을 공사하는데 쓰는거랑 똑같다고 보면 된다.)이 경부고속도로가 서울 시내와 강남을 잇는 '한남대교'를 통해 서울로 연결되었다. 이게 바로 강남부동산 투기의 '''첫번째 촉매''' 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관심은 매우 저조했다. 강남으로 갈 생각을 않았다. 그래서 서울시는 어마어마한 강수를 두는데... 서울사는 디시인들은 2호선이 어케생겼는지 알지? 근데 저건 원안이 아니다. 주종원아재가 처음 2호선을 제안했는데, 이아재가 만든것은 미아리에서 제3한강교까지만 가는 일자형이었댄다. 서울시가 도넛을 존나게 빨아대자, 아이고 시장님 제 것이 수요가 아주 많은데, 굳이 강남길게 도는 걸로 돈낭비하지 마시고 이걸로 끝냅시다하고 이의를 제기하다가, 결국 짤렸다. 결국 역사가 흐르는 대로 서울 2호선은 강남을 지나가는 거대한 도넛이 되서 공사를 하는데 이것이 '''두번째 촉매''' 였다. 근데, 그래도 사람들이 강남에 안온다. 다행히 1972년 영동지구의 주택단지가 완성이 되고 주민들이 입주를 하면서, 뭔가 나아지나했다. 실제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부동산투기가 성행하니까. 근데 이래도 [[반인반신]]이 원하는 수준이 되지 않았다. 이래서 '''세번째 촉매'''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강북에 있던 명문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강제로 옮기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반발이 어마어마했지만, 알 게 뭐야. 저때가 윾신때인데, 당연히 반인반신은 좆까를 시전하고 그 학교들을 강제로 강남에 이송한다. 저래서 만들어진게 8학군이다. 그리고는 '''서울시청, 상공부등의 행정부처를 강남에 옮긴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것이 바로 '''네번째 촉매''' 였다. 또, 70년대의 건설붐이 인다. 이것이 '''다섯번째 촉매'''. 마지막촉매는 강북지방에 유흥업소 건설 제한이었다. 한마디로 강북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애초에 반인반신이 경부고속도로만들겠다고 빼애애액하던 시절에는 나라가 가난충이었던지라,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돈벌고 도로공사할 땅까지 얻어내는 창조적인 방법을 알게 되는데, '토지 구획정리사업'이다. 어뜨케 하냐면, 누가 땅을 갖고 있다. 그럼 정부가 공공시설을 쓸 땅을 지주로 부터 사들이고, 다른 건설비용을 벌기위해 팔 땅인 체비지도 같이 산다. 이 체비지를 팔아서 뭘했기 때문에 체비지의 가격은 비싸야 했고, 땅을 사는 주체가 정부이다 보니, 땅을 사는 과정부터 정경유착이었다. 그리고 상기한 이유로 땅을 비싸게 팔아먹어야 했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를 정부가 '''대놓고''' 조장했다. 특히 중심엔 서울시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어떤 사람은, 서울특별시라 하지말고 서울 복덕방이라고 하라했을 정도였다. 공무원이 대놓고 서울시민들을 관광버스에 태워서는 강남으로 가서 여기 땅사셈. 지가 좆나상승함, 그럼 님부자 ㅇㅇ'하면서 부동산관광을 보내기도 하고,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강남쪽에 땅을 사들이는 것을 권유했는데, 이것도 공무원들에게 주는 혜택이 개 쩔었다고 한다 (존나 쩔어야 투기를 더 열심히 하지...). 이렇게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다보니, 지가는 모친을 출타하기 시작했다. 원래 평당 백, 이백원 하던게 일년 지나고 나선 이삼천원이 되는 상황이었다. 아까 상기한 대로 공무원들이 앞장서서 부동산투기에 참여했던 것 답게, 공무원뿐만 아니라 국개의원, 부르주아의 부인들까지 자신의 부동산 계약서를 자랑하면서 아이고 내가 여기땅을 샀다면서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했다. 당연히 정경유착은 더 심각해졌다. 1970년대 건설붐과 강남8학군, 그리고 서울 관공서의 강남이전썰로 정부는 서울시민들에게 부동산뽕에 중독되게 만드는데 성공했고, 부동산뽕에 빠진 서울시민들에겐, 물질만능주의가 머릿속으로 침투했다. 당시 공무원이고 직장인이고 월급받자마자 복덕방으로 가서 강남땅을 사는데 돈을 탕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복덕방도 수십수백개로 불어났다. 그리고 아까 말햇던 체비지 있지? 그체비지를 많이 사간 놈이 잘난놈취급받던 서울이었다. 이러한 부동산열풍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는데, 1977년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대리 출석과 부정부패는 물론이오, 땅사겠답시고 분양하기 며칠전부터 사람들이 모포깔고(요즘으로 따지면 텐트치고)기다리고 있었고 모인 인파만 150만~250만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많은 인구를 못버티고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온 동네에 경찰이 동원 되야하는 상황이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기덕에 집값이 2년만에 200배나 오를 정도였다. 오죽했냐면 지금 주갤럼들이 저 당시 부동산시장을보면 갈아입을 팬티가 바닥나는 건 물론이요, 아예 까무러칠 수준이었다. 이 부동산 투기 덕에 빈부격차는 더 심화됬는데, 서울의 가난충들은 저런 강남땅을 사들일 기회가 없으니 내집마련은 더더욱 힘들어졌고, 강북지역도 점점 재개발을 하면서, 가난충들은 보금자리를 일허어갔다. 그 가난충들이 살기위해 서울을 떠나 분당, 과천, 군포같은 경기도 외각지역으로 이주해 빈민촌을 만들었다. 그렇게 강남이 개발되면서 강남은 지금의 부촌의 모습을 갖추는데 성공하고 서울의 안보도 더욱 굳건해졌다. 그러나 부동산투기덕분에 애미리스한 강남의 집값이 만들어지고, '''빈부격차가 더더욱 심각해져서 헬조선을 만드는 원흉이 되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