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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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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 일단 땅을 존나게 확장했다. 그 당시 고구려는 여기저기 털리고 소련의 붕괴시점마냥 과거의 영토도 백제나 연나라에게 털려가고 국가좆망 직전 상태에다 기후적으로도 가뭄이 들고 농업이 망하는 등 (현대 이전까지의 인류문명에서 가뭄이 들고 농업이 망하는 사태는 지금으로 치면 식량안보 정도가 아니라 전기도 끊기고 화폐도 마비되고 컨테이너 항만도 죄다 박살나 개판나는 정도의 영향력이었다. 지금도 가뭄이 든다면 영향이 크지만 과거에는 더 심했다는 말.) 서로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로 그 당시 존재한 모든 산업이 좆망 단계였는데,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국가의 기반을 다시 다져 나라를 안정화시킨 것을 기초로 광개토대왕이 잃었던 영토를 넓히고 더 넓히고 더 넓혀 한강 상류 지역과 요동 등 꿀땅을 많이 챙겨가서 후에 [[장수왕]]이 백제와 신라를 야금야금 쳐먹어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시작점을 제공했다. 더욱이 타이밍이 존나 좋았던게 이 당시 후연이 왕 자리를 두고 내분이 심했고 백제도 지속적인 국왕의 교체가 있었을 정도로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이 혼란스럽던 시기여서 황해도와 요동, 그 외 과거 백제나 후연이 쳐묵했던 땅들까지 도로 챙겨올 수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몽골 동쪽 일부 땅도 처묵처묵했던 기록도 있다. 특히 그 당시 후연의 새로운 왕이 고구려 출신이었다. 정확히는 조상이 고구려 출신이 고씨성이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이 우민끼 시전하면서 친하게 지냄. 왜냐면 후연 옆에 북위가 있어서 방패막이로 쓰기 딱 좋거든. 이 때 오랑캐들을 줘패고 요동지역을 처먹었는데 그 곳은 존나게 방대한 초원지대와 소금이 나오는 강이 있었다.(요하강, 라오닝강) 지금도 소금이 나옴. 아무튼 그렇게 쳐먹은 요동지역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 까지 가지고 있는다. 남쪽으로는 이전까지 [[이호성|'나랑께, 빨리 문좀 열어보랑께']]를 시전하며 수시로 대문 똑똑 하며 괴롭히던 백제를 멱살잡고 줘패는 수준으로 쳐들어 갔고 이 때 통수의 달인 신라가 고구려 응딩이 뒤에 숨어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히 왜놈들이 신라를 자주 보만튀하고 다녔는데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놈이랑 놀던 가야까지 족쳐버린다. 정황상 이 때 가야는 금관가야로 추정되는데 금관가야는 이 때 이후로 쩌리국가가 되버리고 만다. 가야의 최후는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마무리를 함. 얼마나 쥐어 터졌으면... 근데 광개토대왕 할애비가 [[근초고왕]]이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뒈짖했는데 위에 국뽕새끼가 쓴것마냥 근초고왕이 원래 수도였던 한강지역 빼앗을려고 쳐들어간게 아니었다. 오히려 한강은 신경도 안쓰고 평양까지 다이렉트로 우회해서 평양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왕 죽이고나서 바로 퇴각함. 이후 짱개한테 서신보내고 작위를 받는다. 왜냐면 원래 평양은 짱개 이민도시였는데 고구려가 옛날에 다 줘패버리고 없애버림. 근초고왕의 의도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백제는 이미 존나 옛날에 한강 뺏기고 수도 이전한 이후로는 멸망할 때 까지 삼국 중에서 가장 약하고 병신국가였다. ㄴ한성백제 시절이 근 500년이고 웅진이랑 사비 시대 합쳐도 한성시절 반도 안되는데 개소리하지마라. 관산성에서 신라 진흥왕 새끼가 동맹 쳐 깨고 통수쳐놓고도 나중에 무왕-의자왕한테 탈탈털려서 당나라 놈들 불러서 간신히 멸망시킨다. 중국 측 기록에도 삼국 중 제일 싸움 잘한다고 되있는 애들이 백제다. ㄴ 내부분열시기랑 멸망기 제외하고 백제가 신라보다 약했던 적은 없다. 아무튼 이렇게 꿀땅을 다 가져와서 고구려가 오래 갈 수 있게 뼈대를 만든 사람은 맞다. 그리고 그 아들 장수왕이 잘 만든 뼈대 위에 살을 덧붙여서 더 키운거지. 특히 장수왕 즉위하고 얼마 안 되서 바로 평양으로 천도했는데 너무 순조롭게 천도가 진행된 걸로 보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기획단계가 끝났을거란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국내성 가본 교수님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이딴 산골짜기 촌구석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500년을 버텼는지 모르겠다"라고함. 지배층들도 "아 좆같아서 촌구석에서 못있겠네 빨리 천도하자"라는 분위기였을 듯. 그런데 초창기 고구려는 좆밥 of the 좆밥이라 대동강 유역 진출은 꿈에도 못꿨다. 그리고 또 하나 삼한일통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속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 기회를 쉬원하게 말아먹었다. 사실 후대의 고려 시기 때도 신라 경순왕을 받아주고 정계에서 활동하게까지 했던 것 보면 이 시기를 그 때 기준으로 보면 삼한일통이나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른다. 다만 군주한테 있어 진짜로 중요한 것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관념도 없어서 '굳이 통일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금이야 삼한일통을 한지 1400년이나 지났으니 그걸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삼한일통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백제 신라와는 언어적으로 비슷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언어가 같다는 것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은 4세기에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냥 백제를 반 죽여놓고 신라를 속국화시킨 정도가 고구려에 있어 최대한의 이익이었을 수 있다. 아무리 언어가 같아도 문화가 다른데 완전히 정복했다가는 갈등과 분열을 유발할 수 있었다. 왕-국가조직 단위로 예속시켜서 통일시켰다가 (불쌍해서 [[이성계]]-[[이방원]] 부자가 [[왕씨 대학살]] 하듯이 항복한 놈들 학살하는 짓은 차마 못하고) 야금야금 힘을 기른 백제, 신라가 나중에 예속 청산하고 독립하고 들고일어나서 고구려의 태왕(대왕) 밑에서 예속되는 관계를 엎었다 라고 볼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이 신라 도운건 안 적어서 끄적여봄 내물왕 (정확히는 내물 마립간) 때 왜적이 계속 깝치길래 신라랑 같이 왜적 소탕 나간적 있음. 그 증거로 신라 유물 중 호우명 그릇이라는게 있는데 광개토대왕 제사지낼 때 쓰는 그릇임 근데 이거 바닥에 광개토대왕비에 써져있는 글시체랑 똑같이 써져있음. 광개토대왕이 신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짱짱맨임 허나 신라는 사실상 외교적으로 고구려에게 약점이 잡혀있는지라 나중에 장수왕 시기에 백제와 나제동맹을 임하게 된다. 장수왕이 남하 정책으로 눈을 돌렸으니 필요로 인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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