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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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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훗날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레이건의 당선으로 공산주의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관계를 결성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체포되어 연행된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982년 12월, 석방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정희 사후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월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 선언을 강요받아 은퇴 선언을 하였으나 김대중이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정부의 일부 인사의 정치 활동 금지가 일부 완화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6월민주항쟁 발생 이전까지 야당 활동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1985년 5월 23일, 서울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을 기습으로 점거하여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며 농성을 벌였다가 26일 자진해산,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인정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 날의 농성 사건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도 참여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미국을 동반자로 생각했던 일부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자 반미(反美)성향을 띠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동반자를 '북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NL이라고 분류되는 주체사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가 부활하고 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고, 결국 노태우는 야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5공청문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였다가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군부 인사들의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정동년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소하였는데 검찰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 5공화국 인사들을 소환하여 조사한 결과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수사보고서는 이 때 작서되었으며 계엄군의 최초 실탄 발포 당시 사격 명령자는 없었던 것으로 발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 유포된 유언비어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에 여론은 들끓어 올랐고 때마침 발생한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화제가 되자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수감하여 처벌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처해졌으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여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최규하는 훗날 정부기관에서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증인으로 출석받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위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8 재판 당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깊게 관여한 것이 인정되어 징역 7년형에 처해졌으나 역시 사면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의 31사단장이었던 정웅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진압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대중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계엄군 및 경찰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28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과 경찰, 시민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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