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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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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씨앗은 1950년대 초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법 때 뿌려졌다. 1946년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형식의 농지 개혁이 이루어지자 남한 농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미군정은 이 틈을 좌익 세력이 파고들 것을 우려해 소작료를 낮추는 등 갈등의 불씨를 잠재우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1948년 제헌 의회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대지주들의 주된 지지 세력이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누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미군정은 소수 대지주들의 이득보다는 소작농을 지원해 정국을 안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농지 개혁에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이런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이승만은 강력한 농지 개혁 추진자였던 조봉암 선생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고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건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으로 1950년 4월부터 농지 개혁이 시작되었고, 1농가당 3정보(9천 평) 이상의 땅은 소유할 수 없도록 했으며 나머지는 국가가 유상으로 매입해 소작농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지주들에게는 지가 증권을 대신 지급했다. 그런데 1967년까지 액면가대로 돈이 지급되긴 했는데 그만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전쟁통에 증권을 멸실하는 등 증권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전통적인 지주 계층이 폭망했다. 봉건적 계급제가 무너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당장 전쟁이 나서 필요한 건 자기 생명을 유지할 식량과 옷가지인데 증권 종이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자식 공부 시키고 도시로 떠나는 농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환경의 혜택을 본 집안의 장남들이 고등학교, 대학으로 진학하여 4.19 혁명의 주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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