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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헌병 통치 체제의 부식 === 어제까지만 해도 11시 외국이었던 조선을 장악한 일본 제국이었지만 행정 전통과 문화 전통의 이질성이 통치의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었고 이러한 장애물에서 비롯되는 페널티를 보완하기 위하여 헌병 제도라는 무단 통치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 요소를 조선에 도입하고 구축한 자는 조선의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그는 일본 육군 원수 출신으로 쵸슈번벌이었다. 조선 통치를 효과적으로 해낸 그였지만 1916년에 물러나서 정치질을 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일본 육군의 거의 유일한 전리품이나 다름없었는데 실제로 일본 제국이 조선 병합이라는 결정을 내린 건 육군을 축으로 하는 쵸슈번벌들의 입김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쵸슈번벌의 육군 출신 인사가 아닌 다른 인물에게 육군의 전리품 조선을 넘겨주기 싫었고 그래서 퇴임 당시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제2대 조선 총독으로 추천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러일전쟁 당시 수려한 통솔력으로 조선반도를 제압한 전력이 있는 장군이었다. 당시 하세가와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평가가 그다지 좋은 인사가 아니었지만, 이러한 육군에서의 화려한 전적을 놓고 볼 때 평타 정도는 쳐 줄 거라고 데라우치가 기대한 듯했다. 하지만 총독으로 앉혀 놓고 보니 웬 좆병신이었다. 일단 하세가와는 육군 이외의 지지 기반이 없는 정치인이었고 뇌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고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고위 공무원들이 새로운 총독을 잘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통제가 느슨해져 죽창맨들이 일어설 환경이 마련되었다. === 쌀 폭동 === {{폭동}} 유럽 대륙의 인민들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고통 받는 와중에 일본은 유럽의 전쟁 특수 경기로 인하여 경제가 날아오르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 광범위한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대규모의 이농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게다가 일본 상인들은 사재기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쌀 공급량이 감소되어 쌀 값이 폭등 수준이 아니라 과장 조금 보태서 공급이 0이 되어서 가격이 무한대로 치솟았다. 이 쌀값 폭등에 확 돌아버린 일본의 흙수저와 똥수저가 죽창을 들고 1918년에 쌀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 폭동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라서 당시 일본의 내각이 이 폭동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를 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에서는 [[산미증식계획]]이 곧 실행되었고 일본은 대만과 조선에서 농산물을 퍼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작, 토지 관련 등 농업 구조 자체에 내재된 문제는 여전하고 오히려 일제가 8년 동안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악화되어 있었기에 농민, 노동자 등 시민층의 불만이 쑥쑥 커졌다. === 죽창 준비 === 그런 중에 천조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는데(여기에 소비에트 CO-mi master 레닌도 동의했다. 1919년 당시에 공산주의가 조선에 막 뿌리를 내리려고 하던 차라서 독립을 주장하던 지식인들은 귀가 2배로 쫑긋했다. 사실 20년대 초반 쯤에는 당시 전세계의 분위기가 민족주의를 긍정하는 여론이 불고 있었다. 거기에 윌슨과 레닌도 힘을 실었던 것.)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어서 움직이는 한편, 국내에서는 고종이 죽었는데 사실 고종이 독살 당한 거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중은 좆나게 빨리 고무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2.8 도쿄 YMCA 독립선언, 만주 독립선언 등의 사건이 뒤따르게 되면서 사태는 이미 총독이 손쓰기에는 무리. 한 구석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종교계 인사들로, 기독교, 불교, 대종교, 천도교 등 종교계 지도자 및 지식인들이 손을 잡고 만세 운동을 결의하게 된다. 특히 기독교와 천도교는 '일제'하면 이가 갈릴 대로 갈리는 판이었고 대종교는 이미 대놓고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본에 반항하고 있었다. 거기에 불교와도 연결되면서(유교층은 한용운이 접촉했지만 몇몇 빼면 연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그래도 유림이 참여하긴 한다.)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된다. 대종교는 당연한 소리지만 이미 한 판 한 데다가 접촉 자체가 힘들어 참여하지 않았다. 주요 인사로는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이 있다. 이중에서 운동 당시 모인 것은 29명, 고문으로 순국 1명, 대부분 석방 뒤 망명하고 일부는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국회의원도 났다. (안 모인 4명은 다른 지역에서 시위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후 세 명은 변절하는데(최린, 박희도, 정춘수) 그 중에서 최린은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아이러니한 건 운동 계획이 들킬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이 최린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대신니뮤들에게도 궐기를 주창해달라고 접촉해봤으나 당연히 응답은 없었다. === 전개 === 민족대표 33인은 갑작스럽게 시위 장소를 바꿔서 태화관(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 위치했던 음식점)에서 낭독하고 바로 경찰서에 자수하였다. 이에 당황한 학생들이 찾아가서 따진 뒤 자기들이 독립선언문을 받아와서 탑골 공원에서 읽었다. 이후 그 33인은 체포된다. 그게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씨발... 오등은 자에 아 조선... 이거 옛날 학교에서는 존나 외우라고 시켰다. 이후 만세 시위를 벌이자 민중이 가세하여 삽시간에 수십만이 참여했다. 동시에 시위가 빠르게 번졌고 4월에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산발하면서 순식간에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물론 과잉 진압이나 고문, 보복이 뒤를 이었고(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일본 육군까지 파견되면서 4월까지는 그야말로 전국에서 총 국민의 1할이 참여, 경찰로는 모자라서 일본군 4천 명까지 투입되는 장관을 연출한다. 참여자 100만여 명 중에서 1천여 명이 사망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1/2019022100174.html] 이후 보복이 뒤를 이었고 외신들도 보도하면서 1910년를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초기에는 평화 시위였지만 일본의 학살에 가까운 무력 진압이 알려지기 시작한 3월부터는 열이 뻗쳐 경찰을 때리는 경우도 꽤 있었다. 특히 농촌 지역으로 확산될 때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땅 잃은 농민들이 낫을 들고 일본 경찰 놈들 모가지를 그어버리는 사례도 속출했다. === 여담 === 이 일로 일제는 "아 씨발 아무리 조센징들이라지만 밟기만 하면 좆되는구나."라고 큰 깨달음을 얻고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그래놓고 산미증식 ㅆㅂ ㅋㅋㅋㅋ 3.1 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민중 스스로 동참하여 "좆본 씨발!"을 외치면서 일제에 반감을 들어낸 것이다. 독립운동가들도 "역시 민중 봉기가 무섭구나."라고 깨닫고 독립운동은 무력투쟁과 민중계몽으로 노선이 나뉘었으며 한편으로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하여튼 뭐 헌법에도 나와있고, 공휴일이고! 시험에도 자주 나오고, 일제시대의 한 분기이기도 하니까 3.1운동이 현대사에서 가진 가치는 존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ㄴ 대충 말해서 이렇단 거지, 좀 깊게 파고 들면 더 의미가 크다. 첫째로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봉건왕조의 노예도, 일본 제국의 신민도 아닌 어엿한 한국인임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당장에 독립으로 직결되진 않았지만 3.1 운동의 원래 목적이 임시정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 정신 고양이니까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박헌영]] 같은 좌파 빨갱이 정치인들도 3.1 운동을 "내가 조선인임을 자각하게 해 준 혁명적 사건"으로 칭송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 20년이 넘었음에도 1918년에만 해도 보통학교(現 초등학교)에 백정 출신이 오면 얼레리꼴레리~ 하고 차별 당하고 친일파 양반 자제들은 존나 신처럼 떠받들었는데 이 운동 이후로 1920년대에는 신분제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20년대에도 신분 해방 운동이 몇 번 있긴 했다.) 둘째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으로 구성된 임시정부였는지 생각해보자. 이건 아래에 서술할 세 번째 의의와도 연결된다. 셋째는 '''이 나라가 봉건왕조의 종언을 고하고 민주 공화국으로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복벽파와 공화파가 서로 치고받고 싸웠는데(심지어 1917년도까지 그랬다.) 1919년 3.1운동 이후로는 복벽파가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당장 대한'''민국'''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자. 이 영향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어서, 1945년 해방 직후 여론조사를 했는데 민중의 90% 가량이 이 나라의 국체를 민주공화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미군정에서도 왜 다른 나라에는 있는 왕당파 VS 공화파 대립이 한국엔 없느냐고 신기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물론 어차피 이렇게 적어봤자 [[역센징]]과 [[급식충]] 놈들한테는 공휴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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