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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령 조선 == === 일제의 문화 통치와 내부분열 조장 ===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일을 다시 터지게 하기 싫었던 조선총독부에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했고, 일본 내의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국과 사이토 마코토의 리버럴한 성향이 겹쳐서 일제는 문화 통치를 통해 식민 지배의 강도를 완화하는 척 하면서 동시에 친일파들을 늘리기 위한 민족의 내부분열을 조장하는 통치 방법을 고안했다. * 문관이 조선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실제로는 단 한 명의 문관 총독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이토 마코토를 제외한 모든 총독이 육군 출신이었다. * 조선 태형령을 폐지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꿨으나, 그 대신 경찰 수를 대폭 늘린 후 사복경찰을 잠입시키면서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조선일보|한국어]] [[동아일보|언론]]을 허용했으나 검열제가 강화되어 언론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 지방자치 참정권을 부여하는 척 했으나 실질적으로 부군면 의회는 금수저들만이 낄 수 있었으며 그마저도 실권이 없고 자문만 하는데다가 의견조차 반영이 잘 되지 않는 기관이었다. 이 외에도 교육 기회를 여는 척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돈이 없는 조선인들은 교육을 받기 매우 힘들었고 회사 설립의 자유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자본에 한국 자본이 잠식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수가 매우 늘어났고 일제의 통치는 더욱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숨통이 놓였기 때문에 많은 문학 작품이 등장하고 조선 전통의 문화가 서양의 문화와 융합될 수 있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한 작품들도 많았고, 나운규 감독이 만든 아리랑은 현재 자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 내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선 내에서의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이 와해되면서 국내와 잠시 단절되었다. 또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당시 임정은 외교독립, 무장독립, 실력 양성 독립의 3가지 방법을 기초로 여러 의견이 갈리고 있었는데 이를 융합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국민 대표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운동 조직이 분열되었으며 임정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1925년에 [[이승만]]이 임시 대통령에서 탄핵당하고 대통령제 대신 국무령 제도를 도입하면서 임정은 이동녕과 김구 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 3.1 운동 이후 조선에서의 활동이 힘들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간도, 연해주 일대로 이주했는데,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이후 만주 진출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진압하고 싶어했다. 결국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처음으로 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사건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만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훈춘 사건]]이라는 희대의 미친 자작극을 벌여 자국민인 일본인을 만주 마적을 이용해 학살했는데, 이를 빌미로 만주에 군대를 보냈고 잠복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기타 부대들이 일본군을 공격하며 [[청산리 대첩]]이 일어났고 독립군이 승리..했는데, 이 전투의 결과가 과장되었다는 설도 존재하니 걸러서 읽도록 하자. 더 부들부들거리던 일본군은 간도 학살을 벌여 민간인들까지 죽여댔고 내전 중이던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로 이동한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인해 볼셰비키들에게 학살당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기타 만주 독립운동가들은 3부를 수립해 조직을 정비했으나 일본이 만주 봉천군벌과 조약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이 위축되었다. === 조선 내에서의 독립운동 ===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이 조선 내에서 많은 무장 투쟁을 벌이며 일본의 골머리를 썩였는데, 대표적으로 김상옥 열사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고 나석주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쪽바리들을 대국적으로 사살하면서 순국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조선 내에서 조선 민족의 힘을 양성하자는 운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물산 장려 운동을 펼쳤으나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실패했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경우 일제가 국립대인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 사실상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1926년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군주인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사망하자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으로 3.1 운동 때처럼 시위를 일으키려고 했고 이를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나 이번에는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금방 진압되었다. 이후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1927년에 [[신간회]]를 결성해 심지어 일본에게까지 허가를 받을 정도로 대성장했으나, 내부분열과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1931년 해산된다. 1929년 일본 학생과 한국 학생 간의 차별을 견디지 못한 광주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면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외에도 1923년 신안 암태도에서 소작민들이 투쟁을 했으며 1929년 원산에서 노동자 탄압을 계기로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는 일본의 노동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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