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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 [[철종]]이 좆선 개혁에 실패하고 결국 보지들을 후리고 술을 퍼마시며 여생을 보낸다. 결국 삼정 문란이 극에 달해 임술민란이 발발해 조선 전역이 개판이 되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어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려 했으나 아무런 효과거 없었고 철종도 죽으며 세도 시대가 종식된다. 이후 신정왕후 조씨가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조선)|고종]]을 즉위시켰는데,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문란한 조선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갈아엎기 위해 사창제, 양전 사업,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뜯는가 하면 서원을 철폐해 유교탈레반들의 만행도 막았으며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개화에도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먼저 조선의 답없는 내수경제부터 제대로 활성화시킨 다음에야 개화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었고, 정작 본인은 내수경제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을 양산하며 물가를 존나 올려놓으면서 조선 경제의 허점을 만들었으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였으나 프랑스 외교관들에게 개무시를 당하자 이에 풀발해 [[병인박해]]를 벌였다. 결국 프랑스군이 이에 대해 시비를 걸면서 [[병인양요]]가 발발했으며, 프랑스군이 어찌저찌하여 철수하기는 했으나 이후 프로이센의 유대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가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을 일으키면서 국제적으로도 지탄을 받았으며, 조선 내에서도 개새끼로 찍혀 서양과의 통상 거부 정책을 강화했다. 이의 일환으로 [[척화비]]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한편 1866년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주민들의 공격으로 불에 타 버린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은 1871년 [[신미양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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