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12·12 군사반란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상세 == [[전두환]]은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부터 촉망받던 군인이었다. 사실 전두환은 [[대위]] 때 [[육사]] 생도 퍼레이드를 기획하여 박정희 지지 이벤트를 열어서 서울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그 덕분에 박정희의 직권으로 전두환은 [[소령]]을 잠깐 거치고 육사 동기 중에서 첫 번째로 [[중령]]으로 진급한다. 이때부터 박정희의 전두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대국적이지 못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고작 별 두 개 주제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임시로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그 후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고 수사를 총괄하게 되면서 군부의 실질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전두환이 수사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0.26 사건과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는 인물 중 개기는 새끼가 있으면 조사 때려 넣으면 되어서 그렇다.) 전두환의 권력이 갈수록 커지자 정승화는 전두환을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전두환을 쳐낼 것을 결심했지만 전두환은 이미 군부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통해 사실상 수도권의 주요 부대의 지휘권을 확보한 상태였고 보안사령부마저 그렇게 장악한 상태였다. 비유하면 사실상 고려 무신정권 시기 [[최충헌]], 왕 모가지 따기 전의 [[이성계]] 정도의 권력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정승화가 자신을 쳐내려고 한다는 것을 일찍 눈치채게 되었고 이윽고 전두환의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과 5.16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구)군부 세력 간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때 하나회 세력은 사조직 주제에 군부보다 정보력에서 훨씬 앞서고 있었는데, 병신같이 하는 거 없고 권력만 높았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같이 죽어버리고,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 또한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주범으로 체포되는 바람에, 사실상 전두환의 보안사령부를 제외하고 제대로 돌아가는 정보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전두환의 직책이었던 합동수사본부장은 타 기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수사가 가능해서 검찰, 경찰 또한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쿠데타 이전부터 군 내 요직을 [[하나회]]가 어느 정도 잡고 있었다. 결국 정승화가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강제 보직 이동시키고 하나회 출신 장성들 또한 외각으로 보직 이동시키는 인사안을 준비하자 그의 움직임은 바로 전두환에게 보고되었다. 이에 화난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한패라는 논리로 보안사 장교였던 허삼수와 우경윤을 보내 그를 체포하는데 이게 바로 12.12 [[쿠데타]]의 신호탄이다. 정승화는 10.26 사태 당시 김재규의 밥 약속으로 궁정동 근처에 있었는데 이걸 빌미로 보안사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정승화가 이에 거부하자 허삼수는 대통령에게 거부하면 체포할 수 있도록 재가를 받았다며 재촉했고 정승화는 이걸 확인하겠다며 대통령에게 연락하려고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총격전이 벌어지고 일이 커진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하나회 반란군은 1공수여단을 보내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령부 헌병대 방송사를 차례대로 장악한다. 육본에서도 9공수여단을 1공수보다 빠르게 보냈지만 반란군의 술수에 속아 9공수에게 복귀 명령을 내린다. 결국 수도경비사령부 주력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장세동]]과 김진영, 조홍, 신윤희 등의 배신으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제압되었고 3공수여단장 최세창과 예하 15대대장 박종규에 의해 특전사령관 정병주 역시 체포되면서 신군부는 군권을 장악한다. 참고로 당시 [[김오랑]] 소령이 혼자서 정병주 사령관을 경호하다가 박종규 중령의 총에 의해 사살 당했다. 같은 쿠데타인 5.16과의 차이점이라면 나라가 개판에 사회 전체 분위기가 막장이었던 5.16 때와 달리 12.12는 별다른 정치적 계기 없이 그저 철저히 하나회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저질러진 쿠데타라는 것다. 만약 이날 북한이 밀고 내려왔다면 대한민국은 그날로 종지부 찍는 거였다. 국군 통수권자 넘버원부터 넘버쓰리까지 전부 공백에, 지휘 체계는 호흡기를 뗀 상태였으니 북한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실제로 당시 남침을 다시 하자는 주장이 당 내에서 제기되었지만 김일성은 미군이 무서워서 상황을 좀 더 보자고 판단하고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쿠데타가 11시간 만에 종료되어서 휴전선 쪽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며칠만 더 끌었으면 진짜 뭔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김일성은 이후 뒤질 때까지 심심하면 "아오 씨발 그날 그냥 소련 성님들 믿고 밀고 내려갈 걸 그랬나" 이러면서 그날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ㄴ 하나 덧붙이면 10.26 사건 때도 김일성은 남침하려다가 같은 이유로 포기했다고 한다. 당시에 궁정동 근처에서 활동하던 남파 간첩들이 박정희가 암살당했다는 상황을 우리나라에 속보로 뜨기도 전에 정확하게 보고하는 바람에 남침하려고 했다고 한다. 29만원 빠는 대가리 없는 새끼들은 전두환이 무서워서 김일성이 못 쳐들어왔다고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씨발 그날 정승화나 장태완이 대북 방어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1군단 소속의 최전방 병력을 서울로 끌고 와서 진압에 썼으면 전두환은 이날 대가리 날아갔다. 그러니까 전두환은 국가 안보를 인질 삼아 반란을 일으킨 개새끼라는 거다. '데헷~ 북한 막느라 최전방 병력 못 뺄 테니까 승리는 나의 것' 이런 생각이었던 거다. ㄴ 추가로 말하면 쿠데타 때문에 최전방 병력을 빼오긴 빼왔다. 진압군이 아니라 '''반란군'''이 말이다. 이 짓거리를 저지른 반란군이 다름 아닌 [[노태우|보통 사람]]이다. 그것도 전두환의 부탁이 아닌 본인이 스스로 상황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고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 9사단 사단장이었던 그는 9사단 예하 29연대를 한미연합군사령관의 허가 없이 무시하고 빼왔고, 이 일로 문어에게 이쁨 받으며 출세 가도를 달린다. 참고로 당시에는 평시작전권도 미국에게 있어서 부대 이동을 하려면 한미연합사령부의 허가가 떨어져야 가능했다. ㄴ 애초에 보통 사람과 [[탱크보이]]는 서로 친구 사이이다. 둘은 육사 11기로 사실상 의형제나 다름없는 평생 친구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탱크보이를 위해서 뭐든지 해줄 수 있던 것이다. ㄴ 당시 북한이 내려오지 못한 이유는 개혁 개방 시도로 [[마오쩌둥]]이 싼 똥을 치우려는 [[덩샤오핑]]의 정책과 핑퐁 외교로 미국과 수교한 지 얼마 안 된 중국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의 도움이라고 했는데, 이미 소련은 그때 서유럽 나토,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골치 아픈 처지였고 전술핵 800개 배치한 한국과 주한미군이라는 벌집을 건들 이유조차 없었다, 아마 북한이 이때 치고 내려왔으면 전술핵과 미군 때문에 벌집 피자 됐을 확률이 매우 높다. (추가 설명하지만 이미 소련은 쿠바 미사일 사태로 전면전 자체를 꺼려했고 대신 제3세계에서 대리전을 일으켰지만 중국도 마오쩌둥 뒈지고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으면서 10년 동안 정지된 국가 재건이 1순위였다.) 게다가 김일성 이 새끼도 판문점 도끼 난동 사건 때 소련과 중국이 "에휴 저 병신이 그냥 원조하는 거 받아먹고 조용히 살지 ㅉㅉ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식으로 방관하는 태도를 보여서 더 이상 중국, 소련 지원을 기대하고 전쟁 낼 생각을 ('못'이 아니라) '안' 했다. ㄴ 그래봐야 이건 결과론이고, 당시 상황이 어땠든 적국의 군대에 견제 및 대처하라고 세운 최전방 부대 빼서 쿠데타에 동참하게 만든 건 종북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국가 반역이다. 정승화는 이때 대장에서 이등병까지 강등된 뒤 전역 당했는데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손길로 복권된다. 훗날 김영삼은 이때 정승화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철저한 정보 보안 속에서 숙청을 준비했고, 그 준비가 끝나기 무섭게 전광석화로 숙청을 진행하여 결국 [[하나회]]의 제압에 성공했다. 만약 김영삼이 정승화처럼 느긋하고 허술하게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면 12.12 시즌2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ㄴ 누가 여기에 청명계획을 썼었는데 청명계획은 노태우 정권 때 있었던 친위 쿠데타 모의였다. 김영삼 정권에서는 쿠데타 시도가 없었다. 참고로 '반란군 = 하나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란군의 대다수가 하나회였던 건 사실이지만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의 경우는 하나회 후원자일 뿐, 하나회 멤버는 아니었고 김윤호, 권정달, 박종규(피스톨 박과 다른 사람)도 하나회가 아니었다. 반면 하나회였음에도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군인들도 있었는데 박세직 전 안기부장(당시 3보병사단장)은 하나회 소속이었음에도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당시 보안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우국일 준장은 하나회가 아니어서 쿠데타 계획 자체를 전혀 몰랐고 아예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과 서로 뜻이 맞지 않았는지 사건 이후 일주일 만에 신군부와 결별한다. 이 때문에 12.12 관련 수사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법정에 피고 신분이 아니라 증인 신분으로 출석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