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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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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건국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구원자'(소테르). 이 사람의 시조 이름을 따서 라고스 왕조라고도 하며 고대 이집트 32 왕조라고도 한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군주가 [[파라오]]라는 명칭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왕조로 이후의 지배자들은 파라오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제국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왕국를 세워 분리할 것인가를 두고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제국분리파가 승리를 거둔 끝에 제국은 분리되는데 마케도니아 본국의 안티고노스 왕조, 아시아 영역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이집트를 기반으로 삼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까지 남아 3왕국이 성립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기반을 잡은 후에는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서 절대 강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술수를 부렸다. 그 결과 이집트를 넘어 소아시아 일부와 키프로스 섬, 코엘레-시리아(현재의 다마스쿠스 부근)까지 영역으로 삼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왕조와 대결을 벌여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는 바빌론까지 셀레우코스를 밀어내는 위업을 세웠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대왕' 안티오코스 3세의 뻘짓(당시 이집트 섭정이었던 소시비우스의 거짓 항복에 낚임+라피아 전투 때의 삽질)로 인해 한숨 돌렸지만 끝끝내 해외영토를 전부 상실했으며 소수의 지배계층인 그리스-마케도니아 인들과 토착 이집트인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20년 넘게 내부에서 반란이 벌어졌다. 군사력을 한정된 그리스-마케도니아 인들로 유지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군사력도 셀레우코스 왕조와 시도 때도 없는 전쟁을 벌인 결과 전부 소모되어 일반 민중과 유리되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급속히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지배층 사이의 암투와 내분,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착취로 인해 마지막 군주인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기 수십년 전부터 왕조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왕조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진 못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이집트가 황제령으로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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