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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군사적인 업적에선 로마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능력 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그닥 뛰어나지 못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을 마친 후 원로원에게서 어떠한 확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군단을 스스로 해산시켰는데, 자신이 유일하게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인 군대를 스스로 해산시켜 자승자박의 꼴이 됐고 원로원은 동방 속주 재편성, 고참병들의 퇴직금 문제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불만이 많았는데 이들을 포섭해서 민회를 장악해여 원로원과 대결을 벌이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동방 원정이 끝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이건 폼페이우스가 아닌 삼두정의 카이사르 작품이었다. 그리고 삼두정치의 우두머리 역할은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아닌, 갈리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카이사르였다. 폼페이우스는 주도권을 원로원이 가져가도록 내려버두었고 동료 집정관인 크라수스와 사이가 매우 나빠 원로원이 약간 손을 쓰자 순식간에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민관이 되기 위해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의 양자로 들어간 클로디우스는 정치세력을 규합해 민회를 장악했는데 폼페이우스의 지시는 전혀 따르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말만 들었다. 이에 원로원이 밀수를 매수하여 로마 시내에 한바탕 혼란이 벌어졌고 클로디우스가 피살되었는데도 폼페이우스는 혼란을 잠재우지 못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전격적으로 귀환하여 루카 회담을 열고 삼두간의 균열을 봉합(크라수스에게 시리아 총독의 직위를 주고 폼페이우스에겐 히스파니아 총독 임명)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는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지만 이렇게까지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닐만한 입지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설적인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막 벌어질 때도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기원전 49년 당시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직위는 그 해 3월 1일자로 종료되는데 아직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카이사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켰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에서 1개 군단과 대기하고 있고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원로원 최종 권고가 떨어지면 그가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가능성은 충분했는데 이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군대 해산 문제를 두고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일단 군단병을 모집하여 방비를 한 후 최종권고의 발동 시기에 대해서 논의합시다.'고 했으나 이는 무시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최종권고를 선포한 후에 군자금과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상식적으로 전쟁을 생각했다면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이치에 맞는 것인데 앞뒤가 안 맞는 이 행동으로 인해(여기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예상과 달리 이탈리아 도시들의 이탈이 굉장히 빨랐다. 불과 50년 전에 동맹시 전쟁을 치르고 로마 시민권을 얻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 주민들은 차별을 받았는데 민중파의 마지막 거두인 카이사르가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이탈해버렸다) 제대로 된 싸움 하나 없이 이탈리아 본토는 카이사르에게 넘어간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 반란 진압, 지중해 일대의 해적 소탕 작전, 동방 원정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었다. 기본적인 전술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승리를 쌓아 큰 그림을 그려내는 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스키피오나 한니발, 라이벌인 카이사르 같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에 대응해 승기를 잡고,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전술가로서의 능력은 부족했다. 세르토리우스 반란 때는 양측이 군단을 이끌고 포진해 벌인 회전에서 두 차례나 발렸고 그 중 한 번은 자기 목이 날아갈 뻔 한 적도 있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지역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일소한 후 그리스로 건너왔을 때 병력 수는 폼페이우스가 더 많았다. 하지만 카이사르 군은 8년 동안의 갈리아 전쟁을 치르며 산전수전 다 겪고 생사의 위기도 여러 번 넘긴 정예 중의 정예병들이었다. 냉병기를 사용하는 당대 전쟁의 특성상 병사를 훈련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실전 경험의 여부가 전투력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군과 적군의 전투력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회전을 걸었다는 건 총사령관으로서는 실격이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난 후 카이사르 군이 양쪽의 사상자를 세어보니 카이사르군은 200명(내지 6천명), 폼페이우스 군은 전사자만 1만 5천명에 포로가 2만 4천명이 나왔으니(내전기의 기록) 병사들의 전투력 차이가 전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 수 있다. 파르살루스 전투 당일의 지휘도 '과연 그 폼페이우스가 맞나?' 싶을 정도였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지나치게 단순하고 정석적인 작전을 구사했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측면을 찌르면 적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걸로 보이는데 카이사르군은 8년 동안의 갈리아 전쟁에서 적이 기병으로 측면을 치고 들어오는 상황에 너무나 익숙했고 재빨리 부대를 쪼개 분리기동하며 포위를 벗어나 승리를 거머쥔 경험이 많았다. 기병의 측면돌격은 정석적인 작전이니 그걸 선택한 건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다. 폼페이우스의 7천 기병은 한차례 돌격이 무력화되자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무너지는 기병들을 재조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기병 부대들도 우회기동을 하려는 움직임 하나 없이 후속부대부터 차례대로 전장에서 이탈했다. 카이사르와 달리 폼페이우스는 20년 넘게 지휘를 하지 않았기에 대규모 회전을 치를 역량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우스의 최후 역시 그의 부족한 정치력, 특히 인간의 심리를 헤아리고 꿰뚫어보는 능력이 부족한 게 큰 원인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 이상 어디로 가든 내전이 계속되리라는 건 분명했는데, 자기 세력권으로 남은 아프리카를 내버려두고 망명지로 굳이 이집트를 선택했다는 건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내전을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보기엔 충분했다. (단순히 위치상 가까워서 골랐을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엔 뒤에서 설명할 옛 부하들에게 바람을 넣은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가 보낸 사절들이 옛 부하들에게 찾아가 예전 상관의 밑으로 돌아오라는 쓸데없는 짓을 했고, 이 사실을 안 조정 대신들은 폼페이우스의 의도를 의심하는 게 타당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오늘내일 할 정도로 상태가 완전 메롱하긴 했지만 엄연히 수백년 간 이어진 왕조였으니 폼페이우스 개인이 마음대로 장악할 수준이 아니었고 몰락한 개인을 상대로 의리관계에 얽매일 이유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판단미스이자 자폭인 셈이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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