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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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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계갑일록]에 보면 1번 , 2번 , 3번 , 5번 항목은 니탕개 난 당시 북방으로 출정한 경력이 있다. 니탕개 난 당시 서울의 한량인 8천은 조방장들이 이끄는 80명 용사들을 따라 북방으로 출정했다. 한량인 8천에게 말,면포를 조공바치고 출정을 면제받는 면제보인 8천명 , 같이 뒤따라가는 종군종자보인 8천+8천을 서울 시정방리인 중에서 뽑았다. 한량은 당시엔 신라의 화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에 니탕개 난 사태가 더 위급해지자 율곡이이는 서울에서 활 잘 쏘는 자 1만명을 더 뽑았다.(율곡전서 행장) 이때 서울 5부 각방의 향도들이 이곳 저곳을 뒤지며 활을 당길수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병조의 색리들은 한 사람 당 면포 5~6필을 내야만 징병면제를 해주겠다고 발표했다. 노비든 잡것이든 백성이든 가리지않고 닥치는대로 뽑게했다. 근데 이때 율곡이이는 병력의 양보단 질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전투말을 사서 바치는 자는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순식간에 구름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전투말 1만여마리가 모였다. 율곡이이는 이때 활을 잘 쏘는 자 1만명을 뽑았지만 이중 활 잘 쏘는 실력을 상 , 중 , 하로 나누어 200명만 장교로 뽑고 그들에게 보인을 주고 나머지는 예비대로 삼았다. 200명 장교들은 먼저 선발대로 북방으로 출정했다. 뒤따라 출정할 부대를 뽑는데. 전투말도 면포도 바칠 능력이 없는 불쌍한 서울 도성 방리시정 백성들은 활을 못쏨에도 전부 북방전장터로 끌려가 서울 시내가 쓸쓸하게 텅텅 비고 결채하는 도성 관청 노비들도 백성들의 탈영을 감시할 보인들로 붙여져 우글우글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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