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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패망에서 건준까지 === 1945년 8월 3일[[소련]]은 독일 패전후 정확히 3개월뒤 [[태평양전쟁]] 에 참전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방적으로 [[일본제국]]에 선전포고 한다. 이로서 8월의 폭풍작전, 즉 소련군의 만주침공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만주국은 멸망(18일)하고 일본제국이 자랑하던 관동군은 말 그대로 캐박살이 난다. 한편 본토에서 토쿄핫(도쿄 대공습)을 찍어 전쟁수행 능력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고 미영 따위는 같잔게 보더라도 노몬한에서 데인이후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던 소련의 전면침공이라는 악몽이 현실로 다가옴으로서, 일제의 멸망이 가시화 되었다. 8월 6일 [[미국]]은 그 가공스러운 핵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시민을 순식간에 [[통구이]]로 만들었으나 그럼에도 정신못차린 일본은 님아 무조건 항복만은 제발여 ㅠㅠ를 외치다 짜증난 미국이 아몰랑 다죽엉~ㅠㅠ을 외치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짬뽕]]을 끓였다. 만약 이때 일본이 항복 안했다면 미국은 몰락작전을 실시하면서 겸사겸사 전쟁을 수월하게 하려고 핵무기를 전 일본 국토에 골고루 더 투하할 계획이었다. ㄷㄷㄷㄷ 본토와 만주가 작살나는 와중 운명의 15일, 드디어 만주를 씹어먹은 소련군이 조선에 진입, 청진의 일본군과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리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이 소련군에게 고깃덩이or오나홀이 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쨋든 마지막 까지 최선과 노오력을 다해 식민지 조선을 쥐어짜기 위하여 몸바쳐 일하던 아베노부유키 총독은 폐망을 준비하면서 자국민들의 안전철수와 귀환을 위하여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접촉, 교섭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한다. 아베 총독은 조선의 중도 좌파 독립운동가 몽암 [[여운형]]과 접촉토록 총독부 정무총감(총리격)인 엔도 류사쿠 에게 지시하였다. 아무래도 미군보다는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가 더 빠를것으로 예상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는데 이때 조선 공산당의 리더인 극좌파의 박헌영에게도 교섭사절을 보냈으나 곧 일제의 패망을 예상한 박헌영은 교섭 자체를 거부했고 국내외에 인망이 있었던 중도좌파 여운형은 총독부와의 교섭에 응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운형은 총독부 측과 해방후에도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다음 5개항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1.전국을 통하여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8월, 9월, 10월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학생과 청년을 훈련 조직하는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5.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총독부측은 패전이 임박했기 때문에 이를 수락하고 여운형 측에게 조선총독부의 권한(치안권과 행정권) 을 인수인개했다. 여운형은 일본인의 안전귀환을 보장하는 한편 조선인들의 안전또한 보장한다는 확답을 총독부로 부터 받아낸 것이다.그리고 여운형은 1년전에 결성했던 지하단체 건국동맹을 소집하고 건국동맹 강령을 제청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날 정오에 일본왕의 옥음방송 즉 항복선언이 낭독되었다. 드디어 마침내 36년만에 일본제국의 지배가 끝나고 1910년에 멸망한 조선으로 다시 환원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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