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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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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youtube|rHScrasGIPg}} === 출사전 === 부친은 제갈규로 한나라 말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냈는데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이에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수습하여 키웠는데 이후 제갈현이 원술에 의해 예장태수로 임명되자, 제갈량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를 에장태수로 뽑아 제갈현을 대신하게 하자 제갈현은 친분이 있던 유표의 도움으로 형주로 이전하였다. 사실 제갈량은 서주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조]]가 [[서주대학살]]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갈씨 일족도 피난을 가야만 했는데, 제갈근은 손책에게 취직해서 손책의 가신이 되었고 제갈량이 일족의 수장이 되어 일족들을 이끌고 제갈현이 있는 형주로 피난갔다. 위빠 놈들은 왜 제갈량이 그 좋은 조조를 버리고 유비 나부랭이한테 취직했는지 의아해 했을 건데 조조가 저딴 개짓을 저질렀으니 누가 제갈량이라 하더라도 조조와 불구대천이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이때 제갈량의 일가가 [[채모]]같은 채씨가문, 괴씨가문, 황씨가문, 방씨가문같은 형주호족들과 통혼하면서 제갈량의 형주 인맥이 형성되는데 이거 가지고 제갈량의 족보가 존나 짱짱하다고 하니 제갈량 가문빨이라고 한다. 근데 시발 과거제도 없고 '''오직 천거제와 군공으로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한나라 시절은 출세하려면 결국 자기 PR 존나게 잘하고 명성 올리고 혼맥을 다져서 유력 인사에게 천거를 받아야 관직에 오를수 있는 시대였다. 괜히 날이면 날마다 [[허소]]의 집에 선비들이 엄청 길게 줄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허소는 인물평을 전문적으로 해줬는데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걸 들고 유력 인사에게 제출하면 즉각 천거를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게 일종의 '''보증 제도'''라서 천거 한 번 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다. 자기가 천거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 일으킨 사람과 그 사람을 천거한 사람이 같이 처벌받게 되어있었다. 일례로 [[손견]]이 죽은 이후 [[환계]]는 혼자 목숨 걸고 유표에게 찾아가서 손견의 영구를 찾아왔는데 이는 손견이 환계를 효렴으로 천거했기 때문이고 환계는 이런 손견이 미치도록 고마워서 죽음을 무릅쓰고 손견의 영구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뼛골까지 선비(士)인 유표는 손견의 영구를 그냥 내주라 해서 비교적 쉽게 찾아오긴 했다. 게다가 후한 말기에는 거의 대부분 천거로만 관직에 올랐고 군공으로 관직에 오른 이가 [[장거]] [[장순]]의 난을 진압한 바 있는 [[유비]]나 구성의 난, 허창의 난을 진압하고 해결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손견]] 정도에 불과했다. 무슨 후대처럼 과거제도로 올라가는 시대가 아니었다고. 거기에 제갈가문은 근본이 서주에서 탈탈 털려 도주하고 예장군에서 도주한 떠돌이 집안이다. 형주 호족들이 이런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가문을 뭐 좋다고 무조건 하하호호하고 받아들였을거라고 생각함? 형주로 굴러들어온 제갈량 형제의 숙부 제갈현이 그만큼 사바사바를 잘했고 제갈량 장인 황승언이 그만큼 형주 제갈가문의 후계자격인 제갈량을 유망하게 보지 않았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양주로 간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 괜히 오나라 양주 호족들의 눈치를 존나게 보면게 아들인 제갈각 새끼한테 '씨발놈아 제발 쟤네들 눈밖에 나게 나대지 마라' 한게 아니다. 그만큼 토착 호족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으면 찍히기 쉬운 굴러들어온 돌이라서 그렇다는 거다. 어쨌거나 당시 인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채풍에게는 1남 2녀가 있었다. 순서대로 큰채씨, 작은채씨, 채모다. *큰채씨는 황승언에게 시집갔다. 슬하에 황씨라는 딸을 낳았다. *존나못생긴황씨는 존나잘생긴제갈량에게 시집갔다. 제갈량이불쌍하다... 사실지가원해서간거긴하다 :ㄴ 근데 사실 황씨는 그렇게까지 못생긴 건 아니다. 그냥 피부가 시커멓기만 할 뿐이었다. 당대에는 미의 기준이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 색깔'''이었을 뿐이다. 실제로도 [[하진]]의 여동생 [[하태후]]는 진짜 시체처럼 피부가 창백했고 키가 매우 컸다. 그래서 [[영제]]가 하태후를 황후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마찬가지로 못생긴, 모든 시대 통털어 다 못생긴 [[가남풍]]과는 다르다. *작은채씨는 유표에게 시집갔다. 여기까지만 종합해보면 채모가 제갈량의 처외삼촌 유표가 제갈량의 처이모부이다. *제갈규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다. 순서대로 제갈근, 제갈량의 큰누나, 작은누나, 제갈량, 제갈균이다. *제갈근은 손권의 가신이다. *큰누나는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에게 시집갔다. 방산민과 방통이 사촌형제다. *작은누나는 괴기에게 시집갔다. *괴기는 괴량, 괴월 등 형주의 유력자들과 친인척이다. 하여간 제갈현이 죽고 청년이 된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다. 제갈량은 '''신장 8척으로 얼굴이 준수하고''' 영웅의 그릇이었으며 늘 자신을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기주 박릉군 출신의 최주평, 예주 영천군 출신의 [[서서]](자 원직)들만이 그를 인정해 주었다. 참고로 위에 볼드체 친 제갈량 외모 미남-위너 인증은 정사 삼국지 쓴 진수 오피셜 인증임, 비슷하게 정사 공식 미남 참모로는 위나라의 [[순욱]], 오나라의 [[주유]]가 있다. === 삼고초려 부터 유비 황제 즉위까지 ===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그를 군사에 임명하여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후한|한실]]을 부흥할 수 있을지 물었고 제갈량은 [[손권]]과 동맹하고 [[형주]]와 [[익주]]를 얻어 국력을 닦고 중국을 침범하는 오랑캐들과 화친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중원의 변란을 틈타 형주에선 한명의 상장으로 진군하게 하고 익주에선 유비 본인이 진천(관중)을 노려 진군하여 천하를 평정할 것을 진언하니 이 계책이 후세에 유명해진 [[천하삼분지계]]이다. 이를 듣고 유비가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신하로 삼아 중히 여기니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는데 유비가 다독이며 공명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것과 같다하니 이들이 불평을 멈추었고 이를 후세에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불렀다. 이후 [[유표]]의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진 유표의 아들 유기가 목숨을 구할 계책을 얻기 원하자 제갈량이 살 방법을 알려주고 유기는 이를 따라 강하 태수가 되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유종]]은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이때 서서도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으니 서서가 어쩔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떠났다. 이후 유비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손권]]과 동맹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 손권도 유비와 동맹할 목적으로 유비에게 [[노숙]]을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노숙과 함게 동오로 떠나 같이 손권을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 싸우길 결의하였다. 이후 유비와 손권 동맹군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뭐 동남풍을 부르고 신선노릇 난리 부르스를 쳤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서 외교관 노릇한게 끝이다. 연의에 안 나오는 에피소드 가운데는 주화파의 리더 [[장소]]가 의외로 제갈량을 높게 봐서 '님 유비 버리고 손권님에게 출사하는게 어떻겠음?' 라고 했는데 제갈량이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화용도에서 조조 잡으라고 한거? 그딴거 있지도 않았고 강릉 뒷치기 해서 뺏은건 연의 드립이고 실제로는 유비와 주유가 같이 싸운 이후 오나라가 유비에게 양도한 것이다. 뭐 연의가 뻥튀기를 존나게 하긴 했지만 주유의 미인계를 간파하고 유비를 말린건 어느정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때 유비는 형남 4군을 취했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이때 [[방통]]을 추천하고 유비한테 뒤질뻔한 [[장완]]을 구해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자 유비가 떠난 형주를 [[관우]]와 함깨 다스리면서 후방을 지켰고,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동오로 떠나는 것을 막았다.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기세 등등했던 연의와 달리 제갈량은 개인적으로 관우에게 쩔쩔 맨건지 마초가 항복하자 '그 새끼 어느정도임?'이라고 물은 관우에게 '님이 더 쩔고여 님하텐 안됨' 이라고 하거나 유비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임명할때 '황충이 [[하후연]]을 때려잡았긴 했지만 관우가 황충을 인정 안할텐데 관우 배려해 주시져.'라고 유비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하긴 유비군 입사 초창기에 관우, 장비에게 쪼인트까였으니 몸 사릴만도 했을것이다. :ㄴ 그럼 법정이 장비 쪼인트 깔 때 살살 달래던 건 뭐임? 아무리 법정이 익주 주요 인사였고 성격 개꼬장이던 놈이라도 주군 의형제하고 동급이냐? :ㄴ 장비 쪼인트 깐놈은 유파지 법정이 아니다. 그리고 장비는 기본적으로 사대부를 존중했는데 유파가 개꼬장부려서 나중엔 유비까지 "개새끼야 조조한테 그렇게 가고 싶냐? 니 써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빡쳐서 화내기까지 한 사건이다. 이건 유파가 개또라이 새끼라 그런거고 장비가 사대부를 공경했고 제갈량이 특별이 유파의 재능을 아껴서 발생한 일이다. 어쨌거나 유비가 가맹관에서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유비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그러니까 한중공방전에선 제갈량은 후방에 처박혀서 군수물자를 댄거고 실제로 한중에서 유비의 난리부르스를 도운건 [[황권]]과 [[법정]]이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이후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가 황제에 오르라는 제신들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제갈량이 황제에 오를것을 권하였고 유비는 황제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엔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223년]] 봄,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켰던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는 영안(永安) 백제성에 머물다가 병이 깊어져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으며 제갈량에게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니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신하로서 헌신하여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한다. 이에 유비는 [[유선]]에게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여기라는 말을 남기고 승하한다. === 남만 정벌과 북벌 === 유비가 죽은 이후 촉한은 유비의 입촉 이후 잠잠했던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이중에선 익주 남부 여러군이 일으킨 반란의 규모가 컸다. 이에 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으며 남만으로부터 군수물자가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이에 군무를 다스리고 병사들에게 무예를 닦게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이때 아직 유망한 젊은 관리인 [[비의]]를 향후 장완의 후계자 감으로 점찍는다. 이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가 죽은 227년에 제갈량은 마침내 북벌을 결심하고 촉한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출사표(出師表)이다. {{인용문|신 량은 아뢰옵니다. 선제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 존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지키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임금께서 귀를 열어 널리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총언과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과 관부는 모두 한 몸이니 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 시랑인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진영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을 화목하게 하고 그 우열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이 바로 전한이 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무명옷을 입은 평민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져 등용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분주하게 힘쓸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악한 흉적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옛 수도(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책과 본분이며, 손익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제갈량|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 1차 북벌 ==== 그리고는 출병하여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이 과정에서 맹달을 회유해서 북벌을 뚜룩치려고 하나 사마의가 재빨리 [[맹달]]을 처죽이는 바람에 실패. 228년 봄, 제갈량은 야곡도를 거쳐 미성을 취하려 한다고 일부러 소문내고 조운, 등지를 속이는 군사로 삼아 기곡을 점거하게 하여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을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이 기회를 틈타 제갈량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는데, 군진이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하니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여 [[관중]]이 진동했다. 위나라의 2대 황제 명제 [[조예]]는 이에 장안에 머물면서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이에 제갈량은 요충지인 가정을 먼저 선점하여 마속에게 요충지를 지켜 장합과 싸우게 했는데 이때 주변 제장들은 오의나 위연을 보낼것을 주장했으니 제갈량이 굳이 마숙을 보내고 부장으로 왕평을 보낸다.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요충지를 버리고 산에 올라 장합을 상대하는 바람에 대패했으며 전후 수습도 안하고 도망가다가 잡혔다, 병신. 이 똥은 [[왕평]]이 천여명의 군사를 가지고 피똥을 싸면서 간신히 수습. 어쨋거나 제갈량은 천수군 서현의 천여 집을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으며 유선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벼슬을 깎았다.<ref>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읍참마속(泣斬馬謖)이고 다른말로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이라고 한다 둘다 '''법은 예외없이 엄격하게 집행돼야 하며 그래야 법의 위엄이 선다'''이지만, 현대에는 슬프지만 어쩔수없이 진행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ref>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 행승상사로 삼았다. 이때 투항자중에 [[강유]]가 있었으니 제갈량은 휘하의 장완, 장예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유를 '양주 최고의 인재'라고 평가하며 중하게 썼다. ==== 2,3,4차 북벌 ==== 이해 12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를 학소를 보내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고 공성병기를 많이 잃어 퇴각했다. 이때 위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2차 북벌) 바로 다음해인 229년 1월에,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 음평을 공격하고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하니 마침내 두 군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은 두군을 점령하고 저, 강의 이민족과 서로 통했으며 촉한의 방위와 위나라 진출의 교두보를 닦은 공으로 다시 승상이 되었다. (3차 북벌) 이후 230년에는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위군이 별 소득 없이 불러가자 위연과 오반을 보내 위군을 다시 격파하였다. 231년 2월에,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병했다. 목우(牧牛)로 군량을 운송하면서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이 옛 북지의 석성에 도착해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기산 북동쪽인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곽회와 비요의 위군과 조우해 그들을 격파하고 보리를 대거 수확했다. 그러나 보리의 손실을 우려한 사마의의 본대가 급진해 험준한 곳에 이르자, 양군은 각기 진채를 정비하며 대치했다. 이후 촉군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자 위군이 이를 쫓아가 5월 10일 경, 노성 부근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이, 기산 남부에서 장합과 왕평이 크게 싸웠는데, 노성에선 제갈량이 사마의를 막고, 기산에선 [[왕평]]이 [[장합]]을 격퇴했으며, 이에 위군의 두 지휘관이 퇴각하여 본진을 지켰다. 이후 [[이엄]]의 거짓보고로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을 추격하게 했고 제갈량은 장수 장합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제갈량이 돌아온 이후 이엄의 속임수가 밝혀지고 이엄은 파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4차 북벌) 이건 권모술수 쩌는 사마의가 장합을 일부러 사지로 내몬거라는 떡밥이 있는데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장합은 출병을 꺼려했다는 사서 기록이 있다. 4차 북벌에서는 [[손권]]의 찐따짓 때문에 실패했다. 제갈량과 손권은 둘이 동시에 위나라를 쳐들어가자고 협의했다. 제갈량이 장안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동시에 손권이 합비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작전계획이다. 때마침 [[장료]]가 죽은 이후인지라 손권은 나름 기회라 생각했었지만 '''손권은 출병하자마자 [[만총]]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결국 제갈량의 4차 북벌도 같이 실패했다. ==== 5차 북벌 및 죽음 ==== [[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수 남쪽에서 대치했다. 이후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사마의가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다리를 만들자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했다. 한편 제갈량은 우회기동으로 위군의 허를 찔렀으나 [[곽회]]의 기지로 인해 저지되었다. 이후 사마의가 교전에 응하지 않고 굳게 지키니 전장은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오장원에서 촉군은 수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위군이 교전에 응하지 않으니 촉군은 오장원에 눌러 앉는다. 평소 제갈량은 늘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오장원에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로서 제갈량은 위수 남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촉군의 둔전이 시작되고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위나라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제갈량은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를 보내 도발하였는데 사마의가 분노하여 싸우기 위해 명제 조예에게 청하니 조예는 신비에게 부절을 딸려보내면서 싸우는 것을 막았다. 이에 강유가 저들이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라 탄식하니 제갈량은 '본디 사마의는 싸울 마음이 없고 단지 황제의 지지를 받아 장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라 평했다. 한편 사마의는 제갈량이 식소사번<ref>食小事煩, 즉 식사는 적게하고 일은 과중하다는 의미로서 당시 평균수명을 따져보아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 늙은 제갈량이 과로하여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f> 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제갈량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여겨 수비를 굳건히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9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이를 후세에 [[추풍오장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이를 추격하다가 퇴각을 맡던 [[강유]]가 군을 돌려 공격할 태세<ref>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외모를 본딴 나무인형을 평소 제갈량이 타고 다니던 수레에 태우고 진군시켜 사마의를 놀래키는 장면이 나온다.</ref> 를 취하니 황급히 후퇴하는데<ref>정사의 기록으론 제갈량 사후 촉군이 군을 정돈하고 퇴각하자 사람들이 사마의에게 급히 알려 사마의가 바로 추격했는데 촉군을 이끌던 강유와 양의가 북을 울리고 마치 공격할 것처럼 대응하자 추격하던 사마의가 군사를 바로 물리고 감히 촉군을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에 촉군이 죄다 후퇴한 뒤에야 후퇴한 촉군의 영채를 살펴보았다고 나온다.</ref> 이런 모습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좆았다는 의미로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된다. 이후 사마의는 후퇴한 촉군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이후 사마의는 촉군의 영채에서 많은 책서와 양곡을 노획한다. === 사후 === 제갈량은 한중 정군산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을 쓰지 말도록 했다. 유선은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제갈량이 죽기전에 표를 올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려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제갈량 가문은 이후에도 존나게 잘나가서 제갈첨이 유선의 부마가 되기도 했으나 촉이 망할때 위군 막으러 싸웠다가 뒤졌다. 언 놈이 삽질햇다고 하는데 중과부적 상태에서 한 번은 격퇴했는데 그게 삽질? 제갈량 사후에도 사천 지역 사람들은 제갈량을 수백 년 넘게 공경했는데, 각지에 세워진 제갈량 사당은 물론이고 제갈량 서거 당시 그를 추모하기 위해 머리에 흰 띠를 둘렀던 것을 대가 바뀌어서도 벗지 않아 나중엔 이게 사천 사람들 특색으로 굳어지게 됐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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