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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태 시절 == [[파일:정회열 흑백.PNG|350픽셀]] 1985년 대륙간컵에서 국가대표 포수<ref>주전은 최해식</ref>로 뛴 정회열(22)은 계약금 2000만원, 연봉 1200만원으로 계약하였다. 이때 연세대에서 같이 뛰던 선수도 같이 1차 지명 됐는데 그 [[이호성|선수]]가... 그 선수와 정회열은 중-고-대 10년간 부랄친구인데 해태에서도 부랄친구였다. 즉 삼성으로 가기 전까지 20여년간 함께 야구를 하였다.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 [[송진우]]가 8회 2아웃까지 퍼펙트로 잡아냈으나 외야수인 [[이중화]]가 파울을 놓치고 결국 볼넷으로 걸어나간 선수가 [[정회열]]이다... 1992년까지 [[장채근]]에게 밀려 후보로 뛰었으나 1993년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93년엔 골든글러브 후보까지 올라왔을정도!<ref>LG의 [[김동수]]가 수상하였다.</ref> 하지만 잦은 부상과 1994년 손바닥 부상<ref>새끼 손가락 부상이라고도 한다.</ref>으로 인해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뛰지 못하고 그 해 팀도 탈락, [[LG 트윈스]]가 우승한다. 1995년부터는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온 [[최해식]]이 주전을 차고 다시 후보로 전락한다. [[파일:96-이대진-정회열.jpg|350픽셀]] 1996년 하와이 항명사태에서 주범으로 찍히게되었고 심지어 [[최해식]]한테 주전자리마저 뺏겼지만 자신의 3번 째 우승 경험을 하였다. 이후 1997년, IMF때문에 부라보콘과 맛동산을 엄청나게 팔아도 나아지지 않는 해태구단 사정과 1994년부터 꾸준히 떨어지는 성적, 잦은 부상 등이 겹쳐 방출된다.<ref>이 때 방출 된 선수로는 이순철, 이건열, 양회열, 김병조 등 12명을 방출하였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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