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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 시기 구분 == {{진지}}[[파일:일본은 강제 징용이 아니라고 하는데...?.jpg|250픽셀|섬네일|[[아베 신조|방사능 코알라]]의 개소리를 듣고 어이가 털린 징용자의 모습이다.]] === 1910년대 이전 === 사람이라는 게, 낯선 장소에 처음 방문할 때는 어색해서 괜히 쭈뼛대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알 사람은 알다시피 1910년대 일본니뮤의 통치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담하기까지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사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집어삼키기 전에 이미 타이완을 통치해본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조선이라는 낯선 곳에서 초반부터 거세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이완을 식민 지배할 때만 해도 일본은 식민지 통치의 경험이 없었던 터라서 재정적으로 손해 보는 짓거리를 많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타이완 섬에 근대 건물도 지어주고, 철도나 도로 같은 사회 기반 시설도 깔고 교육 제도도 정비하고... '근데 원래 식민 통치가 이런 거냐?' 생각하면서 일본은 상당히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중일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러다가 벨기에에게 식민 통치를 받던 당시 콩고를 보면서 식민 통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하필 그 상태에서 병합을 당한 나라가 대한제국이었고. === 1910년대 === 헌병무단통치 기간이라고 부른다. 조선인들을 야만스럽게, 물리적으로 다루면서 짐승 취급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동인도회사에서 영감 받고 세웠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서 토지조사사업을 전개했다. 이 회사는 1908년에 세워진 건물로, 한일합방 이전에 세워졌다. 물론 1907년 [[정미조약]]으로 인해서 머한제국은 이미 껍데기만 남은 나라가 되어부렀기 때문에 그런 건 큰 의미가 없다. 러일전쟁에서 이기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청나라 때와 달리 러시아가 미친 척을 하면서 한 판 더 붙자고 말하면 일본은 그냥 좆되는 거였다. 물론 러시아는 더 빨리 멸망했겠지만. 그래서 일본은 러시아를 벗겨먹을 수 없게 되면서 그 대신 유일한 전리품 조선을 빨아먹는 거 외엔 답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 10년치 정부 예산을 당겨서 써버렸고 실제로 이때 진 빚을 1986년에야 다 갚았다는 썰이 있다. 이렇게 정신없이 빼앗기에 정신이 팔린 터라서 교육, 언론에 대한 통제는 일제강점기 중 가장 약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비교적 약했다는 것이지, 아예 안 했다는 건 아니다. 참고로 일제에게 헌병 경찰제와 교원에게 칼 차게 하라고 귀띔해준 게 이완용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중에는 본토의 경찰들도 차게 된 걸로 봐서는 딱히 조선인들이라고 한 건 아닌 듯하다. 1918년에 터진 일본 쌀 폭동의 기록화를 보면 거리의 도망 치는 경찰들이 칼을 패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간극이 커도 7~8년 이상 차이가 안 난다는 것. 대상 불문하고 위압감을 느끼게 하려고 경찰들한테 지급한 걸로 보임. ㄴ 엄밀히 말하면 헌병 경찰 제도는 프랑스에서 시행했던 거였고 지금까지도 운영하는 국가 헌병대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좆본이 개방 당시 유럽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각 나라의 여러 제도를 참고했는데 이게 프랑스 출처다. 물론 프랑스는 봉건제 당시의 기사 혹은 영주 등 각 토지의 소유자가 그 치안 또한 맡게 되는 수백 년을 이어온 유구한 전통과 대도시 및 중요 도시는 경찰이 맡고 지방은 군대와 경찰 사이의 무언가인 국가 헌병대가 맡아서 경찰이 한 지역에 알을 박고 지역 유지들과 싸바싸바하여 부패하는 걸 막으며 국가 헌병대는 군대처럼 잊을만하면 인사 이동이나 주둔지 이동을 통해 그러한 점에서 최대한 개선하려고 노력하기 위해 만든 결과물이다. 실제 아직도 이런 군대와 경찰 사이의 조직, 즉 준군사 조직을 보유한 국가들은 지방의 부정부패 근절에 아주 적절하게 써먹고 있다. 근데 좆본이 수입하면서 다른 기능은 어디론가 나가리되고 닥치고 주민 통제에만 올인한 이단적인 변형체가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옆 동네 인민 무장 경찰도 티베트나 위구르에서 뭔 일만 나면 갈아엎는 걸 보면 역시 아시아 새끼들은 뭘 해도 다르다는 걸 느끼게 한다. 교원들도 제복 입고 칼 차는 건 내지도 마찬가지였는데 군국주의의 원조였던 프러시아가 문관들한테도 군복 나눠주던 전통을 배워오면서 그렇게 된 거라는 모양. 게다가 인력풀도 씹창이어서 창설 당시에도 본토 경찰 중 지원제가 아니라 추천을 받아 조선 경찰을 구성했다. 근데 그 추천 권한을 가진 경찰 높으신 양반들이 당근 양질의 인력은 남겨두고 말썽쟁이 골칫거리들만 쏙 뽑아 떠넘겼다. 즉 인성왕이신 분들이 추천의 형식으로 발령 받았으며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강압 정책을 방침으로 삼았기에 초창기의 악명은 쩔어줬다. 초딩 세대는 한 6학년 즈음에 잘 만든 가구를 헌납 안 한다고 이토라는 순사 새끼가 멀쩡한 사람 머리를 터트려 죽여버린 소설을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뱀발로 정작 왜경으로 악명이 높은 야인시대 미와는 기병 출신으로 기병대로 왔다가 조선에서 경찰로 전환된 특이한 케이스라는 듯. 우리 증조 할머니는 14살에 시집왔다가 이제 막 신혼 벗어날 즈음에 증조할아버지가 헌병 새끼한테 끌려가서 매 맞고 매독이 올라서 돌아가셨기에 2001년 99세로 타계하실 때까지 80여 년을 독수공방 하시며 남편 없이 우리 할아버지를 키워내셨다. 씨발롬들. 한 술 더 떠서 우리 할머니는 정신대 안 끌려가려고 할아버지한테 시집 왔었고... 문화 통치 시절 없어졌지만 일제가 중일전쟁 일으키고는 국가총동원령(1938)을 때리고 전시 체제로 들어갔기에 이때는 헌병 경찰이 아닌 그냥 헌병 새끼들이 반도 뿐만이 아니라 열도에도 배치됐다. 얼마나 지랄 맞았는지 자국민들에게도 켄페이타이라고 하면 ㅉㅉ 노답 새끼들 소리를 들을 지경이었다. 헌병은 본토인 일본 제국 내지에서도 특별 고등 경찰과 함께 양대 악의 축으로 일본인들에게서도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마자 일본 국민들도 나라 망한 건 속상한 일이긴 하지만 저 새끼들 족칠 수 있게 된 건 정말 다행이라면서 줘 패고 다녔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 헌병은 가슴에 병과장 배지를 달아서 표시하는데(완장은 본래 헌병 보조원(군무원)한테 달아주던 게 헌병까지 차게 된 거)당근 집에 올 때 그거 다 떼어버리고 왔지만 옷에 난 배지 구멍 보고 알아 맞춰서 줘팼다고 한다. 08년도 쯤인가에 나온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인가 하는 영화에 본토 배치 헌병 출신인데 땅개로 전환되어서 이오지마에 전출된 병사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병사들도 저 새끼 헌병 출신이래... 노답 ㅉㅉ 하는데 알고 보니 상관과 야간 거리 순찰 중 가정집에 쳐들어가서는 시끄럽게 짖는 개새끼한테 총으로 쏘라고 상관이 명령하는 걸 허공에 대고 쏘고는 죽였다고 보고했는데 씹눈새 개새끼가 짓는 바람에 상관한테 맞고 전출을 당한 거였다. (개 주인인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그 남편이 아끼던 개라며 아내와 자식들이 통사정을 해도 짤없이 기어코 죽인다. 저 상관은 총성이 개소리보다 훨씬 시끄러운데 총 쏘면 마을사람 다 깨는 것도 모르나 보다. 병신 새끼.) 1960년도에 나온 맨발의 겐에서도 초반부에 등장한다. 거리에 처칠 루스벨트 얼굴을 그려놓고는 지나가는 시민들 쫓아가서 왜 안 밟고 가냐고 지랄을 하는 건 애교고 짐 까서 먹을 거 나오면 밀수품이라고 압수를 해가는 새끼들로 나온다. 주인공 가족은 뺏길 바에야 먹자고 눈앞에서 미친 듯이 집어먹지만 결국엔 쳐맞고 뺏긴다. 같은 나라 국민들한테도 이렇게 묘사되는데 안 봐도 뻔하지... 갑오개혁 때 정식으로 폐지되었던 태형을 조선의 아름다운 문화라고 되살렸다. 이른바 조선태형령. 벌금형에 처해졌는데 못 내면 몸으로 때우라고 해서 맞고 나와야 했다. 더 엿 같은 건 같은 죄인이라도 조선인만 맞았고 일본인이나 외국인은 안 맞았음. 또한 즉결처분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순찰 다니는 헌병들이 언제든지 지나가는 조선인을 때리는 게 가능했다. 적당한 구실만 만들면 땡이었으니까. === 1920년대 === ==== 배경 ====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패전국의 식민지 분할을 위해 민족자결주의(1민족 1국가)를 주창했고 여기에 조선인들이 낚였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련의 민주화 민권 운동으로 인해서 일본 본국의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워진 것도 한몫했다. 이에 따라 머국적으로 조선 민중들은 [[3.1운동]]을 펼쳤지만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 맞섰던 영국 총독부와 달리 일본 총독부는 피도 눈물도 없었기 때문에 자근자근 짓밟혔다. 그래도 일본은 기존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 한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총독을 교체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일본 해군 제독으로서 처음으로 총독에 올랐던 사이토 마코토는 취임하여 한국 땅을 밟자마자 강우규 의사의 폭탄 의거로 죽을 뻔하였고 이에 느낀 점이 있었는지 어떤 카드를 꺼내게 된다. ==== 문화통치(민족분열통치) ==== 교육 과정에서는 민족분열통치로 소개된다. 3.1운동을 진압한 조선총독부는 서구 열강들이 "아무리 그래도 너같이 식민지 관리 좆같이 하는 새끼는 처음 봤다."라며 갈구니까 일제는 좀 더 유화적인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국제적인 언플을 했다. 황당한 것은 당시 서구 열강들도 저마다 식민지를 하나씩 운영하고 있었고 일본은 서구 열강들에게서 식민지 통치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일본보다 더 좆같은 새끼들이 일본을 욕하는 것도 아이러니. 그 주요 내용은 총독을 군인이 아닌 문관 출신으로 임명하겠다는 것, 헌병을 경찰로 바꾼다는 것, 선생들에게 칼을 차지 않게 한다는 것, 언론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 조선인이 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제2차 조선교육령, 1922) 등이었다. 그러나 말만 그럴싸할 뿐이었고 실상은 처참했다. 문관 출신이 총독으로 부임한 사례가 광복까지 단 한 명도 없었고, 경찰은 그냥 헌병대가 옷만 경찰 옷으로 갈아입고 꼴에 보통 경찰이라고 인원은 오히려 더 늘었으며 교육은 좀 더 심해져서 일본어가 주가 되었고 고등 수준의 교육은 온데간데 없이, 4년제였던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가 6년제로, 고등보통학교도 3년제에서 5년제로 늘고, 일본어 교육 시수만 늘렸다. 그리고 은근슬쩍 조선의 학교 교정에 심었던 무궁화는 전부 뽑히고 사쿠라로 교체되었다. 머학교 진학하고 싶다고 했는데 다른 것만 던져주는 좆본 새끼들 ㅉㅉ 물론 "사범학교와 대학 설치의 길이 열렸다."라는 얘기도 했다. 친일 활동을 하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허락하지 않았지만. 언론은 당연히 검열이 더욱 빡세져서 조선의 언론이 대부분 망하거나 일본의 앵무새로 돌아섰다. ==== 여파: 독립 운동 진영의 분열 ==== 이 시기에 이르러서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협력했던 독립 운동 세력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크게 두 노선으로 구분되었던 독립 운동 세력(왕정복고 지향 vs 근대 공화국 지향)은 운동의 전개 방식과 이념 등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개중에 몇몇 우익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는 '타협적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실상 일본의 개로 전락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이 발효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갈려나갔고 40년대에 이르러서 탄압의 대상은 민족주의 등 다른 대상까지 확장되었다. 그렇게 자주를 외치는 사람들이 갈려나갔고, 이는 오늘날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 식민지 경제 ==== 1910년대에는 회사령, 토지조사사업, 어업령, 임업령 등을 통해서 일본 기업이 조선 시장에서 성장할 기틀을 닦으면서 자원을 값싸게 약탈하는 식의 정책을 꺼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이 많아졌고 시장은 이에 따라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물건을 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이 시기에 들어서는 회사령을 철폐하고 경쟁을 하거나 물건을 매매할 조선의 기업을 제한적으로나마 설립하도록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대다수의 재력을 일본인과 친일파가 먹어서 조선인은 상대가 안 될 것이므로 일본 기업 설립의 간소화를 위해 회사령을 철폐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요컨대 1920년대의 조선은 일본이 생산한 제품들을 판매하기 위한 확대된 시장이었던 셈이다. 이런 일본의 속셈을 알아차린 몇몇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했지만 과잉 수요와 헬조선 상인 특유의 바가지, 생산 능력 부족, 국내산의 열악한 품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좆망했다. 교과서에서는 일제의 간섭과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그나마 장점을 찾으라면 1910년대에 비해 강압적인 통치가 어느정도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고 조선어(한국어) 신문도 매일신보 외에는 금지되었던 1910년대와 달리 검열이 있기는 했지만 허용되기도 있다. 언론 자유도 20년대 초중반에는 나름 보장되어서 조선총독부 통치에 대해서 비판을 하거나,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로 교육하는 거를 반대한다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하였다. 물론 일본의 한반도 통치의 궁국적인 목적인 한반도의 완전한 일본(내지)화 (내지연장주의)는 1920년대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1920년대 자체의 일본이 패망 전에 가장 민주주의적인 시대였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1930년대가 되면서 전부 흐지부지 해졌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들을 위한 게 아닌 조선의 독립을 막고 통치의 편의성을 위한 조치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1920년대 동안 계속 유지되었지만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 [[치안유지법]] ====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서 동시에 사회주의도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레닌]] 슨상이 "약소 민족을 독립시켜주자. 우리 소련은 약소 민족이 그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겠다."라는 연설을 하면서 많은 국내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고 사회주의는 정말 순식간에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경제는 공장 존나 빡시게 돌려서 물건 존나 만들고 물건 존나 많이 파는 식으로 발전하는 게 정석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려면 노동자들이 순순히 일을 해줘야 하는데 당시 조선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열악한 노동자 대우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파업과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공장 생산 라인들이 단체로 멈추거나 일부는 파손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가 좆같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얼마 안 가서 사회주의자들을 싹 청소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환상적인 법, 이른바 <span class="plainlinks">[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105112136445 치안유지법]</span>을 제정하게 된다. 내용은 그럴싸하다. 치안 유지에 악영향을 줄 놈을 미리 색출해서 잡는 것이다. 문제는 치안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기준이 모호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국가보안법]]의 애비 수준이다. 이를테면 [[너]]가 생긴 게 사회주의 운동을 할 것같이 생겼다면 체포될 수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없다. 이전까진 그래도 직접 항일 운동을 하거나 밀서를 주고받다가 걸리거나 하는 직접적인 행동 등 체포의 근거가 있어야 했지만 이 법이 생기면서 '수상하게 보이는' 행동과 용모만 있어도 체포, 구금할 수 있었다. 적어도 국가보안법은 정으니처럼 몸무게가 존나 나가서 빨갱이짓 할 거 같다는 우덜식 이유로 그냥 지나가고 있는 파오후를 잡아가지는 않는다. 이걸 가장 잘 써먹었던 대상이 바로 언론이다. 조선 신문에 뭔가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을 만한 단어가 보이면 바로 그걸 트집 잡아서 폐간 시켜버렸고 결국 조선의 언론은 친일로 돌아서거나 멸망했다. 즉 일제 패망 후 전직 일제 고등 형사 출신들이 보였던 '빨갱이 때려잡기'는 갑자기 튀어나온 스킬이 아니다. 이 시기부터 일제에게 꾸준히 애먼 사람을 족치는 스킬을 배워가며 다져왔기에 수십 년 후에도 잘 써먹을 수 있었다. === 1930년대 === 병참기지화 통치 기간이라고 부른다. 이때 대공황의 여파로 침체기를 겪던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국을 건국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본격적인 일본 군국주의화의 막이 오른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일제는 문화통치는 이제 개나 줘버리고 전쟁을 위해 조선인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전쟁터에서 프레깅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끌고 나갔던 조선인들이 자기들은 일본인이라고 느끼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서 조선인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눈물의 똥꼬쇼를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절정에 도달한 건 40년대. 이 시기에는 독립 운동도 지지부진해진다. 민족주의 세력에서는 실력 양성파였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자치론자 VS 독립파(그 안에서도 무장투쟁파 VS 외교론자들이 또 싸웠다.)가 맞섰고 크게 좌우로 분열되어 갈등과 대립을 일삼는다. 교과서에서는 자치론자를 친일파로 분류하고, 변절하지 않은 실력양성파와 독립파만 독립운동자로 본다. 당연히 일제는 실력양성파 편을 들어주고 꾸준히 회유하여 이간질하면서 그들 대부분을 자치론자로 변절하게 만들었다. 자치론자들 활동은 아마 대영제국 자치령 모델을 보고 그런 듯한데 일제에 협력하는 대가로 일제가 조선 통치를 좀 유하게 해주거나 전쟁 등에 참전하는 대가로 일본 하원 등에 대표(국회의원)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결국 몇몇 친일파들이 일제 패망 몇 년 전에 일본 제국 의회에 진출하긴 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일제가 망해서 아무 소용 없게 됐지만. 제정신 박힌 독립운동가들은 자치론자들을 보고 적들에게 항복을 구걸하는 ㅄ새끼들이라고 다들 비웃었다. 정작 일본의 식민 지배 방식은 프랑스 방식의 동화주의로, 일본 내에서도 저 조선인들에게 우리가 굳이 참정권을 줘야 해? 왜? 라면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창씨개명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왜 조선인에게 일본 이름을 주냐면서. 한 마디로 끝까지 지내와 같은 레벨로 취급하기 싫었다는 것이다. 무장독립 투쟁도 만주국 건국 이후로 많이 어렵게 되었는데, 미쓰야 협정(1925)과 자유시 참변(1921)으로 큰 타격을 입고 뿔뿔이 흩어져서 국민당군, 팔로군, 소련군으로 들어가 투쟁을 지속한다. 중일전쟁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질질 끌게 되자 겨울을 대비하고 식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남면북양 정책과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덕분에 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조선의 농민은 더 가난해졌다. 중국 공격을 위해서 한반도 북부 지역에 공장과 발전소를 몰아서 짓는 덕분에 해방 직후 남한은 가난한 농업 국가가 되었고 북한이 전기를 끊어버리는 등 남한이 좆망할 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갈수록 노동자들과 소작농들은 더 가난해지는 신기한 현상이 발생했다. 이건 생산력 증가로 꿀은 지주나 자본가들이 빠는데 무산계급한테는 푼돈만 떨어지며 그마저도 그 생산력 증대를 위한 비용이 무산자들에게 전가되는 악순환 때문이다. 즉 부익부 빈익빈은 이때부터 발생했다. 물론 대지주들과 공장주들은 확실히 함리스 헤븐조센에서 꿀을 제대로 빨았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보면 저 당시 지주들이 일제하에서 얼마나 꿀을 빨았는지 잘 알 수 있다. 조선은 전근대 왕조 특성상 재산권이 일반 백성은 거진 존중 받지 못했는데(즉 방구 좀 끼는 양반이나 탐관오리가 나타나면 닥치고 재산을 뺏기는 거다.) 그나마 근대 국가인 일제는 재산권과 생명권을 등치하는 근대법 체계를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그토록 극혐하는 빨갱이들처럼 재산을 닥치고 뺏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일제 관료와 군경에 기름칠을 열심히 하다가 결국 친일파가 되기도 한다. 안 그런 부자들은 그냥 죽은 사람처럼 일제 눈치만 보면서 숨만 쉬고 지내거나 외국으로 튀거나 독립 운동하다가 가산을 다 탕진해서 거지가 되어야 했다. 소위 친일파는 3대가 떵떵거리는데 독립운동가는 3대가 리어카 끈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 1940년대 === {{지옥}} 민족말살통치, 일본이 다짜고짜 중국과 만주를 공격하고(중일전쟁), 1938년에는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하더니 미국이 중국을 내버려두라고 거듭해서 경고하자 이를 우습게 여기고 진주만에 폭격을 가하여 미국과의 대대적인 전면전이 일어났다.(태평양전쟁) 공공의 적이 된 일본은 어떻게든 미국과 중국과의 전쟁에서 이겨보겠다고 발악을 하며 한국인들의 재산을 샅샅이 털어갔는데, 이걸 유식한 말로 '공출'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경제도 개판이 되어버려서 40년대 조선은 구한말 시절보다 더 거지가 되어버렸다. 이거 통계 낸 거 가지고 그래도 40년대 이전엔 구한말 앰생 시절보다 더 잘살았네 뭐네 하며 지랄 빼애액 거리는 역갤러년들이 있는데 어차피 식민지 경제는 지배자 민족들과 그 밑의 애널 써커들이 다 해먹어서 나머지 서민들 인생은 럭키 북괴 수준인 게 현실이었다. 대기업들이 다 해먹는 지금의 헬조선도 여기엔 못 비빈다. 먼지까지 털어가면서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46년 이후) 조선인들에게 참정권 등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동조선 놈들이 약속을 지켰을지는 의문이다. 근데 해괴한 게 궁성요배니 황국신민서사니 하는 건 또 조선인(친일파) 작품이었다. 하여튼 좆같은 친일파 새끼들은 역센징 새끼들과 똑같다. 심지어 인적 자원도 미친 듯이 털어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이 되거나, 군수공장으로 끌려가서 공장 먼지 마시면서 죽을 때까지 열정페이로 일 하다가 죽거나, 일부는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었다. 역갤러들은 이 와중에 남자들은 강제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었지만, 여자들은 정당한 모집을 통해 적정한 월급을 받고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위안부 짓을 했다며 2개의 일본설을 주장한다. 일본은 페미니스트 국가였던 것인가. 차라리 위안부가 정신대라고 주장하는 게 더 믿기 쉽겠다.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결의로 한국을 일본화하기 위해서 일본은 한국어를 못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시켰지만 결국 천조국과 쏘오련에게 개박살 나면서 핵폭탄 맞고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일제강점기가 끝났다. 참고로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마루타 실험으로 끌려간 사람은 그냥 뒤지거나 반병신되어서 평생 병신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치안유지법으로 감방 갔던 조선인도 마루타 대상이었다. [[윤동주]]가 유명한 예시. ㄴ 반병신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살이 전제였기 때문에 마루타 실험으로 끌려간 사람 중 생존자는 아무도 없고 1945년 8월이 되자 한방에 다 죽여버렸다. 썰이지만 딱 한 명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증인을 남기기 위해 저들 중에서 제일 어린 사람 한 명을 몸빵으로 살려줬다고 하며 죽은 척했다가 살아남아 증언했다고도 하고... 근데 또 어디에선 저렇게 살아남은 사람 확인 사살 혹은 소각할 때 결국 죽었다고 하며 이건 사실 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온 게 와전된 거고 실제론 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간 여기서 생체 실험한 자료를 미국에 넘긴 대가로 책임자들이 살아남는데 성공했는데 미국이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봤다가 좆도 별거 아닌 내용이라서 '우리가 속았구나!'라고 존나 빡쳤다는 썰이 있다. 하여간 이시이 시로는 천수는 누렸지만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으며 은둔해서 살아갔고 나머지 책임자들은 떵떵거리며 일본 의학계를 이끌면서 잘 먹고 잘살았다고. 근데 [[히로히토]],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개새끼들은 이걸 부정하고 근대화 지랄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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