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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이집트 선왕조|선왕조]] 및 [[이집트 초기 왕조|초기 왕조]] 시대 === 현생 인류의 고향인 아프리카와 가까웠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살아가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100만년경부터 구석기 시대가 열렸고 기원전 7500년경에는 상이집트(나일 강의 상류 지역. 나일강 삼각주를 포함하는 하류 지역은 개발이 되지 않아 파피루스가 무성한 늪지대 천지였다)에서, 기원전 6000년 경에는 하이집트(나일 강 하류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인간들이 정착생활을 하며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긴 마을들이 모여 도시국가를 이루었고 도시국가들이 모여 테베를 중심으로 하는 [[상이집트]]와 멤피스를 중심으로 하는 [[하이집트]] 2개 국가를 형성하게 되고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대결을 벌인 결과 생산력에서 앞서던 상이집트가 주도권을 쥐고 하이집트를 정복하여 통일 국가를 형성하여 이집트 선왕조 시대를 끝내고 초기 왕조 시대를 열게 된다. 선왕조와 초기 왕조 시대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고 그나마 남은 것도 단편적인 게 대부분이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이집트 문명의 기틀이 잡혀가던 시기였다. === [[이집트 고왕국]] 시대 === 이후 [[이집트 제3왕조]]가 개창되면서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로 돌입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피라미드]]가 건설되었고 이집트를 통치하는 군주로서 [[파라오]]의 개념이 잡혔다. 현재 기자에 남아있는 3개의 피라미드(대피라미드, 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모두 고왕국 시절에 건축된 것이다.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던 고왕국은 [[이집트 제6왕조]]의 끝물 파라오인 [[페피 2세]]의 지나친 장수만세(4살에 즉위해 94년 간 왕위에 앉았다. 보수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65년간 재위했다고 볼 정도로 너무 길었다)로 인해 후계구도가 엉망이 되어 왕권이 땅에 떨어졌고 말기에 접어들어 지방세력이 발호하여 활개를 치면서 국력이 소진된 끝에 제8왕조가 개창되면서 멸망한다. === [[이집트 제1중간기]] === 제1중간기는 고왕국 멸망 후 [[이집트 제7, 8왕조]]~[[이집트 제11왕조]]에 이르는 시기로 통일 이집트가 다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리되어 대립하던 시기로 워낙 혼란했던 시기인 탓에 기록이나 유적이 남아있는 게 적다.(다만 몇몇 살아남은 부조 등을 통해 과거와는 달라진 양식을 볼 수 있다) 그나마 이집트 전역을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던 제8왕조가 문을 닫고 그 뒤를 이은 [[이집트 제9왕조]] 때는 상이집트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해 반쪽짜리로 전락했고, 테베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에서는 유력 지방세력들이 서로 다툼을 벌이다가 [[이집트 제11왕조]]가 발생하여 하이집트 지방을 정복하고 [[이집트 제10왕조]]를 멸망시켜 재통일을 하여 약 130년 동안의 제1중간기를 끝냈다. === [[이집트 중왕국]] === 중왕국은 제1중간기를 종결한 [[이집트 제11왕조]]와 후신인 [[이집트 제12왕조]]가 속하는 시대로 이 때 남쪽으로 진출하여 현대의 [[수단]] 북부 지역인 누비아 지역을 이집트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중왕국의 파라오들은 제1중간기의 혼란기를 거울삼아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지방세력을 박살내는 데 전념하면서 고왕국 시절의 피라미드를 모방하여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중왕국 시절 지은 피라미드는 암석이 아닌,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았다. 이 때문에 손상이 더 심해서 현대에는 더 예전인 고왕국 시절에 암석을 깎아서 만든 피라미드의 보존상태가 낫다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또한 이 시기에는 왕실 의식이나 제례용 절차 등을 남기기 위한 기록만 남겼던 고왕국 때와 달리 본격적으로 재미와 유흥을 위한 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는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과의 대화', '아메넴헤트의 대화' 등이 있다. 건축면에서도 고왕국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 기법 등은 더 발달하여 뛰어난 유적들을 남기는 등 엄청난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 허나 중왕국 말기에 들어 중동 지방에서 [[전차]] 기술을 가지고 쳐들어온 힉소스족(이들은 셈족으로 추정한다)에 의해 하이집트 지방을 빼앗기면서 중왕국이 멸망하고 제2중간기가 시작된다. === [[이집트 제2중간기]] === 제2중간기는 고대 이집트 인들이 [[힉소스]](Hyksos)라 칭한 이민족이 혼란에 빠진 이집트로 들어와 아바리스를 수도로 삼고 파라오를 자칭하며 [[이집트 제15왕조]]가 세워지고, 토착 이집트인들이 세운 [[이집트 제16왕조]]가 대립하는 시대였다. 힉소스 인들은 신전 건축 양식이나 도자기 제작법, 매장 풍습 등이 비블로스, 우가리트 등 북부 레반트 지방의 것과 유사해서 이 지역 출신의 셈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래전부터 이집트와 교류가 있었다. 제12왕조의 파라오 크문호텝 2세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중에는 [[세누스레트 2세]] 시절, 서부 아시아인들이 선물을 가지고 파라오를 방문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 중 누비아 산양을 몰고 앞장선 자를 힉소스인 아비샤라고 기록하여 힉소스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과거에는 힉소스인들이 하이집트를 무력으로 정복했다고 봤으나 현재의 연구 결과로는 힉소스 정권이 도래하기 150년 전부터 아시아인들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꾸준히 이집트로 이주해 온 기록이 있고, 그 중심이 오래전부터 청동기 시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아바리스였으며 토착민과 이주민 90명의 치아를 비교한 결과 차이가 없었다는 등 평화적으로 하이집트를 지배했던 걸로 보고 있다. 한편 토착민들이 세운 [[이집트 제16왕조]]는 북으로는 힉소스 인들,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쿠시 왕국에게 샌드위치로 털리며 얼마 가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 잔해에서 [[이집트 제17왕조]]가 개창되었고 꾸준히 세를 불리던 제17왕조는 마침내 힉소스 인들을 몰아내고 하이집트를 다시 수복하여 신왕국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았던 시절이지만 수레와 [[청동기]]라는 신문물이 들어와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집트 문명에선 순동기 사용 시기가 상당히 길었다. 이집트 내부나 주변의 시나이 반도 등지에서 구리를 쉽게 조달할 수 있었지만 주석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 중동지방의 청동기 문명도 페니키아 인들이 영국까지 가서 주석을 들여와서 발달했다가 [[바다 민족]]의 발흥으로 무역 네트워크가 망가지자 문명이 크게 쇠퇴했다) === [[이집트 신왕국]]([[이집트 제국]]) === 이집트 신왕국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상 최대 판도를 넓혔던 시대로 신왕국 시절은 제국이라고 칭할 수 있는 수준에 달했다. 가나안 지방을 넘어 시리아 지방까지 진출했고 (이곳까지 영토를 넓힌 [[투트모세 3세]]에겐 '역류를 건넌 자'라는 칭호가 붙었는데 나일 강만 보고 산 이집트 인들에게 나일강과 반대로 흘러가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큰 충격이었기 때문)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 중에서 이름을 대면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는 [[투탕카멘]], [[람세스 2세]] 등이 전부 이 신왕국 시절의 파라오들이다. [[이집트 제18왕조]], [[이집트 제19왕조]], [[이집트 제20왕조]]가 속한다. [[람세스 2세]] 사후에 뒤를 이은 최후의 명군인 [[람세스 3세]]가 사망한 후 신왕국은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해 거의 500년의 기간을 버틴 후 멸망하고 제3중간기가 시작되었다. === [[이집트 제3중간기]] === 제3중간기는 [[이집트 제21왕조]]~[[이집트 제25왕조]]가 속하는 시대로 혼란 그 자체였던 시기였다. 쇠락해가는 국력을 뒤따르듯이 파라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국가 내부에선 대분열이 일어나 이집트는 수많은 리비아계 소왕국과 도시국가들로 사분오열되었다. 이 와중에 한창 누비아에서 세를 불리고 있던 쿠시 왕국의 왕 피이는 이집트화가 상당히 진행된 군주였고 혼란에 빠진 이집트를 집어삼키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상이집트를 정복한 후 하이집트 지역까지 공격해 이집트를 재통일했다. 하지만 피이는 본거지인 누비아에서 멀리 나가는 걸 꺼려해서 전 왕조의 파라오를 죽이지 않았는데 아들 대에 마무리 지으면서 순혈 흑인들이 파라오의 자리에 앉았기에 '에티오티아 왕조'나 '흑인 왕조'라고 칭하는 [[이집트 제25왕조]]가 개창되었다. 제25왕조는 재통일한 이집트의 피해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이집트와 누비아 양식을 혼합한 피라미드 등을 지으면서 잠깐이나마 신왕국 시절과 비견될만한 영화를 누렸으나 동쪽에서 대규모로 세력을 늘려 쳐들어오는 [[신아시리아 제국]]에겐 당해낼 수 없었고, 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테하르카의 아들 타누테멘이 이집트 수복에 실패하면서(1차전에서 아시리아 군을 깨부수고 옛 수도인 멤피스를 비롯한 영토를 상당히 회복했으나, 물량으로 밀고 들어온 아시리아에게 2차전에서 패배했다)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전락하여 말기 왕조 시대가 시작된다. === [[이집트 말기 왕조]] === 말기 왕조는 외세의 간섭을 받던 왕조([[이집트 제26왕조]] : [[신아시리아 제국]], [[이집트 제27왕조]]와 [[이집트 제31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토착민 왕조([[이집트 제28왕조]], [[이집트 제29왕조]], [[이집트 제30왕조]])가 엎치락뒤치락하던 시절로 까마득한 옛날부터 독자적인 문화권을 이루고 살아가던 이집트인들은 외부 정복자들에게 적대적이라 툭하면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아시리아가 피정복민들의 반란으로 멸망한 뒤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었으나(따라서 이 시절의 파라오는 전부 페르시아 황제들이 겸임했다) 페르시아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지는 사이에 이집트는 독립하여 토착 왕조를 열었다. 그러다가 [[이집트 제3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가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세스 3세]]를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상이집트를 거쳐 누비아 지방으로 도망가 최후의 토착 이집트인 왕조가 문을 닫게 되었다. 페르시아는 다시 이집트를 정복했으나 11년 만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공으로 멸망해버려서 그대로 헬레니즘 제국으로 편입되었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벌어진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부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근거지로 삼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하여 말기 왕조 시대는 끝난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 제32왕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위에서 서술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시대 구분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절의 신관이자 역사학자인 [[마네토]]가 만든 것으로 현대의 이집트학 연구자들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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