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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청주성을 점령한 이인좌는 절도사 이봉상(李鳳祥)<ref>낌새가 좋지 않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이 양반이 씹고 가만히 있다가 성 내에서 친구 양덕부가 성문 열어주고 홍임한테 칼빵 맞고 죽었다. [[이순신]] 장군니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ref>, 토포사 남연년(南延年)의 모가지를 날렸다. 권서봉은 이인좌와 협업을 약속하고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로 몰래 들어왔고 장례식을 한다면서 상여에 무기를 넣고 숨어 다녔다. 이인좌는 점령 이후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 박종원을 영장으로 삼고 물자를 모아가기 시작하고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4일 만에 창의사 박민웅에 의해 털리고 망했다. 쌍도에서 안음현<ref>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ref> 대호족이었던 정희량은 반란군의 영남 방면 군 사령관이 되어 조상 묘를 [[영주시|영주]]의 [[부석사]]로 옮긴다고 구라를 치고 안음의 지 사저에 물자를 쌓아두고 군머를 모았고 청주로 오라는 이인좌의 말에는 응하지 않았다. 3월 10일쯤에 이웅보(李熊輔)가 이인좌가 양성으로 북진할 때 정희량과 함께 안동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 새끼가 안음에 처박혀있네? 그래서 빡친 이웅보가 안음으로 직접 가서 안음현 고현창에서 거병했고 안음 현감 오수욱(吳遂郁)과 거창 현감 신정모를 협박해 3월 27일, 두 현을 날로 먹었다. 둘은 각각 현 병영으로 토끼고 신정모는 담 넘어 런했다. 또한 [[합천군|합천]] 호족 조성좌(曹聖佐)는 정희량에 응하고자 군수 이정필(李廷弼)을 협박했다. 하지만 조성좌 본인은 깜빵에 갔다가 3월 22일 새벽에 이정필이 빤쓰런 한 뒤에 석방되었다. [[삼가군]]의 신만항 역시 현감 이정수를 쫓아내고 합천 반란군에 응했다. 에엑따 시발 경악한 경상 감사 황선(黃璿)은 [[성주군|성주]]목사 이보혁(李普爀)을 우방장으로 삼고 성주, 지례군, 고령군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계군수 정양빈(鄭暘賓)을 좌방장으로 삼고 [[의령군|의령]], [[함안군|함안]], [[산청군|단성]]의 군머를 다스리게 하여 진압했다. [[구미시|선산부사]] 박필건 또한 반란 진압에 응했다. 3월 28일, 반란군은 거창에서 함양으로 들어가 즌라도로 런하고자 했다. 함양 군수 박사한이 이 반란군을 담그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반란군에 붙어서 난항을 겪다가 반란군이 함양을 빠져나가자 부역자들 모가지만 자르게 되었다. 전라도도 반란에 협력하려고 했지만 진작 전라 감사가 눈치 까고 반란 모의했던 태인현감 박필현을 미리 작업 쳐버렸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대규모로 반란군이 거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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