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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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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본래 조선 조정은 [[여진족]]을 포함한 북방 이민족들이 도내에 많이 살고, 국경은 그들과 접해있다는 함길도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토관제'라고 해서, 인망이 있는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통치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토관제를 실시하면서도 여진족의 세력을 약화하고 조정의 행정력을 키우기 위해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남방의 주민들을 계속 이주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계유정난|말도 안 되는 쿠데타]]로 [[수양대군]]이 집권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었다. 이 새끼는 좆병신 같은 정통성 때문인지 통제를 강화하는데 이 통제 강화의 일환으로 실시된 [[호패]]제와 함길도에 직접 중앙 관료를 파견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직접적인 화근이 되었다. 이 정책들은 함길도 호족<ref>"수령 파견 문제는 몰라도 호패는 왜?"라고 물을 텐데 당시 함길도 호족 중에서는 사민정책으로 올라온 이주민들을 자기 세력에 두고 있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호패 때문에 이주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에 시달렸다고.</ref> 과 도민들이 조선 조정에 가지는 반감을 키웠다. 이시애는 이런 불만을 가진 호족, 도민의 세력을 집약, 백수가 된 동안 자신의 반란군 집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삼도]]에서 출병한 군병이 함길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미 [[충청도]] 군병이 배 타고 [[경성군|경성]], 후라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도 병사가 출병, 설한령을 넘어 우리도로 넘어와 도민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는 등의 [[선날승]]을 시전하여 민심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1467년 5월 초 길주에 와있던 함길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의 모가지를 뎅겅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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