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이순신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이순신의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위에서 롤충들이 설명했지만 현실은 어땠을까? 흔히 매체물에서는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에 대해 열세였던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당시 삼도통제사 휘하의 조선수군 병력은 1만여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일본수군 전체병력인 9,500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 미디어에서는 병력 대신 선박 척수를 가지고 일본수군이 우세였다는 뉘앙스로 설명하곤 하지만 이는 북괴 해군이 한국 해군보다 강력하다는(선박 수를 가지고 숫자놀음) 헛소리와 동급의 개소리다. 더 정확하게 따지면 그 1만의 정예 군사를 누가 육성했는가를 따져야 하는데 경상수군은 개전 초기에 트롤러 두명이 깡그리 말아드셨기 때문에 전라수사인 이순신과 이억기가 육성한 군사들이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철저한 군율 관리, 실전같은 훈련<ref>500여년 전에 이미 적군으로 가장한 대항군을 따로 창설해 부대장에게 직접 임명장까지 주었으며 이를 통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했다, 현대 한국군이 [[KCTC]] 만든게 2000년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로선 엄청나게 선진적인 훈련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ref> 으로 이순신은 부임 초기 흐트러졌던 전라좌수군의 기강을 바로 잡아 강병으로 육성했는데 예로부터 명장의 조건 중 하나에 강병의 육성이 들어간다는 것을 따져본다면 이순신의 공적은 의심할 바가 없다. 거기에 명량 해전의 불리한 전세만 놓고 보면 확실히 대단한 장군인 것이다. 일본 수군의 주력 함선은 중소형함인 코바야와 세키부네이고 판옥선과 동급인 아타케부네는 소수였던 반면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은 대형함(동아시아 기준)인 판옥선이었고, 병력 수가 비슷한 이상 당연히 조선 수군의 함정 수가 더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숙련도에서도 조선수군이 우위에 있었다. 조선수군은 '전문화된 수군', 즉 해상전에 특화된 수전훈련만을 받은 군대였다. 반면 일본 수군은 육군과 수군 간의 경계가 없었다. 일본의 주요 수군장수들(ex:도도 다카도라<ref>통제사 승점 자판기. 첫 패배는 옥포에서 노략질하다가 걸려서 된통 깨지는게 시작이다. 근데 이 사람 행적을보면 싸움꾼 사무라이보다는, 행정관료, 요즘으로 치면 도시기획가에 가깝다</ref>, 와키자카 야스하루<ref>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는, 창들고 앞서나간 7명으로 손꼽히면서, 용인 전투에서 수천으로 수만을 무찔렀다는 명성을 얻고 남해로 내려가고는 한산도에서 와장창 개박살난다. 하사받은 영지에 해적들이 있어서 그런거지 전문적인 해전 지휘관은 아니다.</ref>, 구키 요시타가<ref>이놈은 이름이 아예 아홉 귀신이란 뜻이다. 어쩌다가 대장군전을 득템한 이후 그걸 잘챙겨서 도주했다(...)</ref>)은 모두 육전에 필요할땐 육전에 투입되었고, 해전에 필요할땐 해전에 투입되는등 육전과 해전을 병행했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조선 최악의 패전으로 꼽히는 용인 전투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작품이다. 일본에서 그나마 전업수군에 가까운 부대로 '무라카미 해적'이 존재했으나, 얘네는 정규군도 아닌 용병 왜구이다. 따라서 일본 수군은 사실상 육군이 배에 올라탄 부대나 다름없었다. 일본군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단련된 군대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일본 내 내전이나 육전에 특화된 집단이었을 따름이다. 바로 옆동네 영주를 공격하는데 수군은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일본 군대의 역량은 섬나라 군대답지 않게 기형적일 정도로 육군에 올인되어 있었다. 바다를 건너온 쪽은 일본군이나 전체 병력에서 수군이 점하는 비중은 오히려 조선이 더 높았고, 그나마 일본에 수군이라고 있는 부대도 해상수송업무를 겸한 육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ㄴ누가 쳐들어오지도 않았으니, 수군을 전문적으로 양성되지도 않았거니와 통일된 정부가 있는것도 아니니 당연히 대규모 해군이 양성 될 수도 없다. 결국에는 자기네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적당히 조운선같은거나 삥뜯는 해적이 생길 수 밖에. 전문적인 해군을 양성하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다만 수전의 수준이야 어쨌건 전국시대도 수전은 벌어졌으며, 일본 수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그게 땅에서였건 바다에서였건)실전 경험을 겪어본 부대임은 잊어선 안될 것이다. :ㄴ조선 수군도 실전경험 측면에선 절대 무시할 수 없던애들인게 허구헌날 왜구와 쳐싸워댄게 얘들임 물론 비정규군이랑 싸운거지만 :ㄴ왜군의 해전 개념은 지나가는 함선의 삥뜯는 약탈함대 수준이거나, 공성전을 해상전으로 치르는거고 좀 더 나쁘게 말하면 화포 개발한 고려시절의 최무선때와 전략전술의 차이가 별로 없는 셈이다. 차이점 정도라면 철포/배락(원시적인 수류탄)가 생겼다 정도. 그리고 비정규군이다 뿐이지, 싸우면서 전공하나 획득하거나 무사, 영주들의 눈에 띄면 출세하기도 쉬운게 전쟁이니 그럴수 밖에. 전술적인 측면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조선수군은 일본수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백병전은 일본 수군의 거의 유일무이한 전술이었으나, 위에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선은 대개 중소형 함선이었는데반해, 조선수군의 선박은 대형함이었기 때문에 일본수군은 사실상 공성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백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백병전은 일본수군 뿐만이 아니라 조선수군에게 있어서도 주요 전술이었는데, 고지에서 전투에 임하는 측이 저지대에서 싸우는 쪽에 비해 유리한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왜선이 접근시 저쪽은 화살과 조총이나 쏘는데 이쪽은 조선판 클레이모어인 조란환으로 갑판을 쓸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ㄴ근데 판옥선이 세키부네보다 높았을텐데 어떻게 근접사격함? 당시 총통으로는 조란환 하향사격 못할텐데.. :ㄴ꼭 내쪽 함선이 쏠거 없이 내가 탱킹하는 동안, 다른 함선이 쏘게 하면되지. :ㄴ근접전이란 게 꼭 도선하기 좋게 딱 붙어서 싸우는 거라고 보면 안되지. 그냥 갑판 상부의 전투병력만 살상할 수 있을 정도로 각도와 거리 유지하면 되지. 화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인 이시이 켄지에 의하면 코바야선은 화포를 장착할 수도 없었으며, 세키부네는 선박 당 화포를 1문 그것도 경량포인 불랑기 밖에 달고 다니지 않았었다. :ㄴ불랑기를 달면 다행일거다, 소모를 건조가 못 따라가서 도요토미가 직접 건조를 감독할 지경임을 생각하면 그렇게 구조방어력이 좋다고 할 수도 없을거다. 그리고 포술도 발달하지 못한 왜군인데 불랑기를 달기 보다는 오오쓰츠나 달았을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이, 조총의 사이즈나 늘린 물건을 대포취급하니까.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동시다발적인 수송작전이나 혹은 전쟁의 목표물(조선 국왕)을 탈취하기 쉬운 지점인 한강 유역에 대한 기습전략 등을 감행하지 않고 부산포에 병력을 몰빵으로 떨군 이유는 일본측이 그걸 원해서 그런게 아니라 일본수군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서 부득이하게 그랬던 것이다. 16세기에도 일본은 여전히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선박을 건조하는 수준이었으며, 일본의 항해술은 사실상 계절풍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수륙병진작전은 논외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양을 개전 한달도 채 안되서 점령한 일본군이었지만, 한양의 입구인 강화도나 한강 하구, 또는 교통의 요충지인 한강 상류의 조선군 진지는 그냥 노터치로 놔둔 것이고, 칠천량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수군이 그 기세를 몰아 조선 해안가를 장악하긴 커녕 경상도 해안지역에서의 약탈행위를 하는데 주력하여 조선 수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갖다준 것이다. 다만 이게 이순신을 까내릴 근거는 되지 못하며, 실제로 사학계에서도 이런 점을 가지고 이순신을 까대진 않는다. 당장 '''이순신이 지휘할때 빼곤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에게 단 1승도 챙기지 못했다.'''<ref>이런 문제로 이순신을 깐다는 럿이 겁나 멍청한 소린게, 당시 일본군의 전략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상유십이 장계에서 왜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까지 범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고 했었다. 적의 의중을 전혀 알수 없을 경우 최악을 설정해 이에 대비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기본중의 기본이다.</ref> 이순신이 승리한 전투 중 불리한 상황에서 치른 전투라고 할만한 것은 원균이 병력을 홀라당 까먹고 난 뒤에 벌어진 전투인 명량 해전 정도 뿐이다. 오히려 100척 이상을 두번이나 깨먹은 원균이 대단하다고 봐야할 정도.<ref>말아먹기도 이정도면 예술의 경지다</ref> 하지만 아군에게 유리한 전장만을 20여회 연속으로 잡을 뿐만아니라 사상자가 거의없는 승전으로 이끄는 것도 보통 장수가 엄두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또한 각 전투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부대가 입은 피해도 경미한 수준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순신이 명장임은 반박불가능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보다 더 대단한 명장인 것이다. 안과 밖에서 모두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 이겨버린 카이사르보다 단순 회전을 이겨낸 한니발이 군사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최대한 승리 확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전쟁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전쟁 일지를 보면 그가 지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전투를 몹시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제독과 장군은 질 변수가 있는 전쟁을 싫어하지만 이순신은 정말 전장에서 모든 변수를 지우는 능력이 탁월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왜군들을 본인이 원하는 전장으로 끌어들여서 본인이 원한 그림대로 전쟁을 진행해온걸 알 수있다. 일본 수군보다 한단계 진일보한 화력과 기술, 엄격한 균율과 통제, 철저한 정보수집, 엄청난 량의 훈련, 적을 원하는 전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최대한 패배의 변수를 지워내고 이기는 전장에서 이기는 전투를 해왔음을 알수 있다. 말로는 겁나 쉽게 느껴지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건지는... 실제 전쟁은 문명이나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다. 물론 원균과 선조의 하드트롤로 맨주먹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명량해전과 결사항전 했던 최종 전투인 노량해전은 제외. :ㄴ단순하게는 병력의 훈련도와 무기의 준비만 생각 할수도 있지만, 통제사께서 싸운 곳은 바다. 그것도 복잡한 해역인 남해였고, 초임지가 북방 여진족과 맞닿은 지역임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것이다. 손자병법에도 나오지만 애초에 명장은 두가지 종류가 있다. 이길 수 있는 전투만 골라서 하는 장수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기는 장수. 제대로 된 병법서라면 당연히 하나 같이 전자를 진짜 명장으로 꼽는다. 전쟁이 얼마나 힘과 물자를 소모하는지 생각해보면 이길 수 없는 전쟁은 본래 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전쟁만 하는 게 맞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이런 류의 장군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명량해전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도 이겼으니 명장의 두 가지 종류에 다 포함된다. '''그냥 사기캐 먼치킨, 진정한 명장이다.''' 이순신 장군은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덕장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엄격한 군율과 법에 의한 법가 통치자에 가까웠다(요즘으로 따지자면 초 FM군인). 기록상 이순신이 나간 전쟁에서의 전사자보다도 군율을 어긴자에 대한 참수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게 옆나라에서 전쟁 준비를 뻔하게 해오고 있고 1년도 안되서 처들어 올께 뻔한데 한명, 한명 하는말 다 들어줘 가면서 나빼고는 답도안나오는 전장을 승리로 이끈다는거 자체가 넌센스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그런 군인으로써의 통치를 본인이 참수한 병사보다 전사자 수를 적도록 하는 말도안되는 연승기록을 통해 책임졌기 때문에 이걸 근거로 이순신을 깐다는건 말도 안된다. 인격적으로는 글을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도 많이 마셨고, 승정도 놀이나 활쏘기도 엄청 즐기셨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명량 해전에서 13척 가지고(사실상 대장함 혼자서)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본 함대를 격퇴한 시점에서 어지간한 명장들을 초월한거다. 위에는 이순신 장군님의 군사적인 역량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는데 이순신이 더욱 대단한 이유는, 중앙 정부로부터 어떠한 원조도 받지 못한채로 전시에 군수보급, 물자보급, 전투훈련, 대민지원, 정보작전에 이르기까지 단 한부분도 소홀한 부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일선에서 전쟁을 치르던 와중에 사정이 어려운 최후방 정부에게 공물을 바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힘든 업적을 해낸 와중에 주요 공직자들의 충성심을 얻어내고 말단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군기 단속을 성공한것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순신 장군님의 통솔력의 한계가 어디인가 생각해보게된다.<ref>당시 전라방면으로는 왕에 버금갔을 것이다. 군대의 보전과 훈련, 보급은 그렇다손 쳐도, 전라좌수영에 물자가 좀 있다는 소린 어디서 들었는지 망할 조정은 종이 좀 보내라고 공문까지 보냈고, 이 종이를 받는다.(제정신이 맞나 싶다. 더 심각한 건 이 종이 이외에도 각종 물자들이 후방의 조정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순신이 부리는 군대가 나가는 족족 이기니 아예 피난을 좌수영으로 오는 백성들이 늘어나 이들을 무인도에 들여보내 둔전을 개간하고 이를 총지휘했다. 난중일기에는 피난민이 살 무인도를 물색했던 기록과 이후 이곳의 둔전에 무씨를 심었고 이것을 감독할 이를 정해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쯤되면 왕, 즉 선줘가 무서워할만 하다. 아니 무서워 할 수 밖에 없는것이다. 통제사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나라 하나 만드는건 순식간이었으니까.</ref> 현대전으로 따지면 최전방에 배치된 부대가 중앙 국방부의 아무런 원조도 받지 못한 상태로 모든 군수품과 보급품을 자급자족하고, 그러고도 군수/보급품이 남아서 상황이 안좋은 국고로 환수하는, 그러면서 전투에서도 승률 100%를 자랑하는 그런 부대라고 생각하면 좋다. 방산비리로 군자금 때먹을 생각이나 하는 한국군 장성들은 이순신장군님을 생각하면서 좆잡고 반성해야할 필요가 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