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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 == [[1932년]] 경상북도 대구부(現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했다. 중딩 때 체육슨상으로 부임한 [[김재규]]와 친해진 적도 있다. 실제로 김재규가 매우 아낀 제자였다. [[1958년]] 헝가리 혁명 때 반소반공반독재 운동을 펼치러 헝가리에 가려 했지만 아무리 반소반공운동이라도 시대적 한계 때문에 공산권에는 갈 수 없었다. 같은 해에 [[동아일보]]에 취직해서 [[이승만]]과 [[자유당(1951년)|자유당]]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이때 [[김두한]]과 인연을 맺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의 민정이양 문제에서 트러블이 생겨 감옥에도 다녀왔지만 이때 박정희와 친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덕분에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나갔다. 이때 [[차지철|짬지털]]이 국회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횡포를 벌였다고 증언했다. 참고로 [[김두한]]이 자지철에게 맞장뜨자고 하자 자지철이 쫄아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불러일으킨 사카린 밀수 사건 때 정부를 비판했다가 샘쑹의 높으신 분들에게 견제를 당했지만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3선 개헌]]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반대, 후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때 박정희에게 [[김형욱]]과 [[이후락]]의 경질을 조건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훗날 힘도 못쓰고 숙청당하지만 이후락은 빽이 세서 70년대 내내 이만섭 의원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결국 7, 8대 대선에서 낙선하면서 [[10월 유신]] 이후 정치인 생활은 잠시 그만뒀다.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서 부가가치세를 까다가 간사한 [[차지철]]이 고의로 박정희에게 잘못된 보도를 하는 바람에 쫓겨날 뻔 했지만 [[김계원]]과 [[김재규]] 등의 만류로 살아났다. 신군부가 집권하자 박정희 정권 때의 여야당 모두를 정치규제시키는 일이 있었지만 이만섭 의원은 다행히 피해갔다. 민주화 이후에는 [[1993년]]에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맡았고 [[신한국당]]에서 [[이회창]]이 머통 후보로 당선되자 [[이인제]]와 함께 당을 박차고 나왔다. 그런데 피닉제와 다른 것은 이분은 양심적인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2000년]]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2년]]에 국회법이 개정되어 국회의장은 무소속이 되어야 하는 원칙에 따라 최초로 의무적 무소속 국회의장이 되었다. 노무현 탄핵 사태 때는 노무현 탄핵에 찬성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행보가 마치 자기를 버렸던 [[유신정우회]]와 비슷해서 노무현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이다. 친위정당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분이 [[열린민주당]]이라는 당 꼬라지를 보면 통탄하실 것이다. [[2004년]]에 정치를 은퇴했고 [[2015년]] 서울 서대문구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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