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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 멸망의 일등공신== 사관적 논조가 아직도 미개하기 이를데가없는 중국에서는 영락성세라 부르며 영락제가 명나라의 최고전성기를 이룩한 위인으로 소개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사실 이놈이 명조 멸망의 원흉이였던것이 밝혀진다. 위에 써져있다시피 영락제는 환관들을 우대할것을 발판삼아 자신만의 여당을 조직하지만 명나라의 환관은 주원장이 자신의 독재권력을 강화하기위해 정치권력을 부여한 집단으로서 주원장도 그것을 인지하면서 일부로 측근의 환관은 6품의 하급환관을 기용하는등 환관들을 경계하였다. 허나 영락제는 외골무인이기로 멍청하기때문에 환관들의 정치권력을 견제하질못하였고, 이에 오늘날의 여당격으로 등극한 태감(환관최고정치기구)은 도당(문관최고정치기구)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으로 황제와 문관과의 거리를 멀어지게끔 만들었으며 그 자리에 자신들의 권력으로 채워넣음으로써 명나라 특유의 환관정치농단이 벌어지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환관정치농단 당시에는 환관짱깨새끼가 조선으로 가서 행패부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 외에도 수도를 연경(오늘날 북경)으로 옮긴것은 본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명조입장에서는 최악의 선택이였는데, 본래 주원장대에 수도로 세워진 남경은 남으로는 킨자이가 있어 물자가 매우 풍족하였고 동으로는 상하이가 있어 물자를 운수하는데 매우 용이하였던 중국대륙의 최고 명당이다. 이미 그 가치를 진시황때부터 알아보아 진시황은 이 자리에 왕기가 있다하여 왕기를 누르기위해 소나무를 가져와 빼곡히 심어놓고 이름도 금릉에서 말릉으로 바꾼적이 있었다. 다만 남경은 사방이 뚤린 평야지대이기때문에 안보에 있어서 매우 취약하였던점이 있었다. ㄴ안보에 취약할걸로 치자면 위치 자체가 유목민 근거지 코앞인 북경이 더 병신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락제 뒤지고 딱 25년만에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 짱깨들이 존나게 고민하는 것 역시 북경이 한반도와 너무 가까워서 만약에 미국과 맞짱뜨게 될 경우 수도인 북경이 너무 쉽게 노출된다는 점이다. 괜히 사드 가지고 내정간섭 해가며 개지랄병 떨어댄게 아니다. 청나라 역시 북경이 워낙 가까워서 이자성이 병신만든 명나라를 잽싸게 냅더적 할 수 있었다. 허나 영락제는 자신의 정치 기반을 다지기위해 모든 이점을 내팽겨치고 물자를 수양제가 건설한 운하를 따라 멀리서 운수해와야하는 북경으로 바꾸고 말았던것이다. ㄴ 세월이 흐르고 재정비를 끝내고 다시 쳐들어온 몽골 계통의 유목민인 오이라트와 타타르, 그리고 훗날의 만조족까지. 수도가 최전방과 너무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영락제는 자신의 정력을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데에 쓰지않고 오로지 북경을 군사기점화시켜 아무소득없는 북방정벌을 수시로 행하였으며, 장강에 몰려있는 국민의 삶과 멀리 떨어진 북경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발언만을 쏟아내며, 간언을 하는 문관을 온갖 중상모략으로 참형에 처하게 만드는 환관들속에 영락제는 타락하기시작하였으며 그 타락은 명조가 끝날때까지 멈출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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