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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인용문|"검을 갈아 돌로 만든 정이 갈라지고, 말이 장강을 마셔 장강이 말라버렸다. 우리왕조의 백만전포는 붉게 물들었는데, 모조리 강남 남녀들의 피로구나." |장홍범의 회양집 中. <ref>최후의 저항을 이끌던 장세걸과는 친척지간이다.지 손으로 동포들을 결정적으로 도륙낸 새끼가 지은 시라고 하기엔 앗쌀하다. 싸패새끼셨나</ref>}} 남송 최후의 방어선인 양양성이 6년에 걸친 [[공성전]] 끝에 함락된 후,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은 포풍처럼 남송 전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 시점에서 남송 정부가 항복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도 않을 상황. 그러나 최후의 순간이 눈 앞에 바로 보이는 시점에서도 남송 정부는 최후까지 항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20만 명의 [[의병]]들이 모였다. 여기에 조광윤에게 선양한 전대 왕조인 후주의 시씨 가문도 함께 했다. 남송군이 마지막 영끌로 모은 천여척의 함대는 몽골 함대의 격렬한 공격을 수 차례 막아냈다. 그러나 고립되어 식수와 식량마저 차단당한 상태로 계속 분전하기란 누가봐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남송의 함대는 전멸에 이르게 된다. 남송 함대는 전투를 위해 선박끼리 결속을 해놓았는데, 전투 최종국면에 이르러 오히려 몽골 수군이 더 쉽게 남송의 선박에 침입하여 공격하는데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이미 굶주림과 기갈에 시달리던 남송 수군은 몽골 군과의 [[백병전]]을 베겨내질 못하고 [[학살|떼죽음]]을 당했다. 중국 통일 왕조중에 가장 군사력 약한걸로 후대에 맨날 까이고 지금도 까이는 송나라지만 남송멸망 시기의 항전은 절대 깔 수 없다. 당장 그 양양성에서 무려 6년을 버텼다. 몽골은 양양성 함락에만 수십만을 쏟아부었으며, 6년이나 걸려서 겨우 함락시켰다. 그렇다고 남송이 양양성을 내다버린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물자 수송 하고 지원군 보내려고 사력을 다했다. 양양 뚫리자마자 남은 병력을 다 끌고 모아 황궁을 다 불태우고 최후의 함대를 만들어서 버텼다는건 진짜 대단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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