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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유년기 === 1878년 11월 9일, [[강동군|평양 동촌(東村)]]에서 이주한 농부 안흥국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치삼이었는데 10살에 학교를 다니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1892년,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대동군|평양부]] 남제산면 노남리(現 북괴령 평양시 낙랑구역 송남리)로 이사하면서 노남리댁 셋째로 불리게 되었으며, 저명한 성리학자 김현진에게 한학, 성리학을 배우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뒤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초토화되는 것을 목격하고 [[동학농민운동]]까지 겪으면서 구국의 대열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온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로 올라간 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운영하던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여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장로교도가 되었다. 1897년 보통부를 졸업한 그는 교사로 취직하고, 그 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의 강요로 안성 이씨 이석관의 장녀인 이혜련(당시 13세)와 혼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런 중매결혼은 안 한다고 버텼으나 씹혔고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렇게 상경한 뒤 [[서재필]], [[이승만]], [[유길준]], [[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이승만, [[양기탁]], 윤치호,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했으며 곧 해당 대회의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했다.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 책임자로 임하고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유명한 웅변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곧 진압당하면서 낙향하여 한동안 교육자로 활동한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웅변을 통해 청년들을 감동시키면서 모은 자금으로 1908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1909년에는 김좌진, 이갑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창립하면서 애국계몽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었고 서북 지역의 개신교 독립운동가들이 단체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서 국내 활동은 더 이상 무리라고 판단하고 미국으로 가기를 선택한다. ===미국 생활=== 1913년에 그는 민족운동단체(흥사단)를 설립했고 이후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계속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 정부가 설립되려고 하자 그동안 모은 성금을 챙기고 상하이로 옮겼다. 그리고 1919년 4월 13일에 선포(4월 11일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임정 활동=== [[여운형]]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3.1 운동 직후 일본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여론이 안 좋아지자 이를 환기하고 일본과 조선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청했을 때, 이동휘는 일본과 타협하는 일이라면서 극구히 반대했지만 안창호는 오히려 노잣돈까지 따로 챙겨주면서 그를 믿었다. {{인용문|안창호: [[서북 방언|적을 알아야 하니까니 가서 니야기를 들어보라우. 이거 얼마 되딘 않지만.]]<ref>당시 30원을 줬다. 조선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이 5원(많아야 1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었다.</ref><br> 여운형: 허나 임정 안팎에서 야단들입니다.<br> 안창호: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 하하하.}} 그리고 여운형은 이때 도쿄 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외교적 1승을 챙겼다. 안창호는 이동휘처럼 급진전쟁론 수준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준비한 다음에 전쟁을 하자는 점진전쟁론을 내세웠다. 그 외에도 남탓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의 부족함부터 탓해야 한다면서 이승만에게 일갈하는 발언도 임정에서 활동하는 동안 많이 냈다. 위임통치 청원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는 안창호도 여기에 어느 정도 가담했던 사실이 있었기에 당시만 하더라도 이승만을 변호하는 입장이었겠지만 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노선을 갈아탄 탓인지 이승만과 마찰을 많이 빚었다. 이승만이 당시 법적으로 제정되지도 않은 대통령 직함을 달고 대통령 행세를 하면서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는 모습에 그러지 말라고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승만은 이에 대해서 떠들지 말라며 무시한다.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적에 그는 개조파로 있었는데, 덕분에 현상유지파였던 김구와도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윤봉길 의거 때 피신하라는 얘기도 안 건네는 덕분에 안창호가 체포된 일이 있었는데 이게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지금도 간혹 나온다. ===탈임정=== 안창호는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 직후 피신하지 못하고 체포되었고 국내로 압송되면서 5년 간 옥살이를 하다가 형량을 채운 그는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때문에 다시 체포되어서 옥살이를 다시 하게 되었지만 윤치호의 앙망문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고문 때문에 폐렴, 간경화를 앓았지만 치료 비용은 윤치호와 김성수가 납부해주기까지 했음에도 결국 병세를 못 이기고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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