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신라구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한국 역사서에 없는 존재 ‘신라해적’=== 9세기에 쓰인 일본 사서를 보면 ‘신라해적’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810년대부터 일본 측의 피해 사실들도 기록되고 있으며, 표현도 다양했다. ‘신라해적’을 비롯해 ‘신라구도’, ‘신라적도’ 등에 기록되고 있는 것. 그러나 한국 측 역사서 어디를 봐도 신라에 해적이 있었다는 기사고 나오지 않는다. 가해자 격인 신라에는 없는 기록이 유독 일본에만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 측에서는 신라해적으로 인한 여러 피해를 당하면서 공식적인 대응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방어체계 등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를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만약 일본 역사서 기록대로 신라 ‘해적’이었다면 이들이 신라 측 역사서에 등장할 개연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 이후의 일본 역사서는 매우 정확하다고 말한다. 특히, 신라해적에 관한 내용이 많이 소개돼 있는 <일본후기>와 <일본기략>, <일본삼대실록>의 기록은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해적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어도 무방하다.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해적 중 가장 규모가 큰 침공은 894년 9월 5일에 있었다. 11세기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 <부상략기>는 신라해적의 대마도 침공을 자세하고 기록하고 있다. 894년 9월 5일 신라해적선 45척이 대마도 남서해안가에 나타났으며, 이때 사로잡힌 해적 포로는 자신들의 근거지에 배 1백 척과 2천5백 명의 군대가 있다고 진술했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