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베이징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역사 == 춘추전국시대 때는 연나라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며, 당시 이름은 계({{Lang|zh|蓟}})였다. 연나라의 수도였어서 연경({{Lang|zh|燕京}})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러다가 연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그냥 지방도시로 남았다가 삼국시대에 [[유우]] 및 [[공손찬]]의 본거지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나라 시기에는 범양({{Lang|zh|范阳}}) 절도사본부가 설치되었으며, 755년 [[안사의 난]]이 이 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후 [[오대십국시대]] 후진({{Lang|zh|後晋}})의 짧은 통치를 거쳐서 936년 요나라의 치하에 들어섰으며, 938년 요나라가 5경부 중 하나인 남경({{Lang|zh|南京}}, [[난징]]과는 다름)으로 삼는다. 이후 [[금나라]]가 1153년에 이 곳의 이름을 중도대흥부({{Lang|zh|中都大兴府}})로 고치고 수도로 삼았으며, 이후 원나라 시기에 현 베이징성보다 약간 북쪽지역에 수도를 건립한 이후 대도({{Lang|zh|大都}}), 몽골어로 칸발리크({{Lang|zh|汗八里}})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다가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이곳에 도성을 건설한 이후 도시 이름을 '''베이징'''이라고 명명하면서 현재 베이징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다. 현재 베이징의 도시구획 및 유적지들은 상당수 이 명나라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이후 청나라가 점령한 이후에도 베이징을 그대로 수도로 삼으면서 명나라의 모습은 그대로 청나라시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1860년에는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인 [[베이징 조약]]({{Lang|zh|北京条约}})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의화단운동시기에 서구 열강에게 함락당한 적도 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시대에는 수도가 난징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으나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위안스카이]]의 반대로 인하여 수도는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1928년 [[중국 국민당]]의 북벌로 인하여 수도는 그대로 난징으로 간다. 그리고 이 시기에 베이징은 베이핑({{Lang|zh|北平}})으로 개칭된다. 중일전쟁시기에는 일본군이 강점하였으며, 이후 도시 이름을 베이징으로 환원한 뒤에 이 곳에 중화민국임시정부({{Lang|ja|中華民國臨時政府}})라는 괴뢰정권을 수립시킨다.<ref>그리고 이 정부는 후에 중화민국남경국민정부({{Lang|ja|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 일명 왕징웨이 정권이라는 일본 괴뢰국 산하로 편입되어 사라진다.</ref> 그러다가 중화민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토를 수복한 이후 베이핑으로 다시 개칭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점령 이후에는 이 곳의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이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Lang|zh|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를 통하여 베이징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 결정된다. 1989년 6월 4일, 이 곳은 [[천안문 6.4 항쟁|매우 평화로웠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