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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해방 이전 === 유년기를 [[함흥시]]에서 보냈다. [[개성시]]로 이사 가서 호수돈 여자고보를 졸업하고 1927년 [[이화여대]]에 진학했다. 원래 예과에 처음 입학했는데 1년 뒤에 영문과에 재입학했다. 1931년 졸업 이후 용정 명신여학교<ref>친지의 주선으로 들어갔다.</ref> 와 배화여자고보<ref>1932년에 전출갔다.</ref> 에 슨상으로 부임했다. 1933년 [[이광수 (문학인)|이광수]]의 주선으로 [[안호상]]과 혼인하지만 바로 이혼하고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 일제시대 친일 언론이었던 매일신보의 고정필진이라고 불릴 수준으로 일본제국의 황군을 찬양하는 시를 많이 썼으며 친구였지만 훗날 종북짓을 했던 [[노천명]]과 함께 악명 높은 여류 친일파 씨발년으로 분류된다. 이 년이 집필한 유명한 불쏘시개로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그대로 묘사한 〈동방의 여인들〉(1942), 전쟁 참전을 독려하는〈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등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5공 시절에는 군인에 대한 대접과 군머의 인식이 어떤지 보여주는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7)를 썼다. 이 시는 2006년까지 머한민국 군머 수양록(병들의 일기장)의 표지 책갈피에 게재되어 있었다고 하니까 그 수준을 알 만하다. === 해방 이후 === {{인용문|'''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린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였다.'''|크리슈나 메논, 자신의 흑역사에 대해 회고하며}} [[런승만]]을 사까시하면서 따라다녔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인도 외교관 메논을 미인계로 구워 삶은 전적이 있다. 때문에 당대에는 헬조선의 진정한 국부는 메논, 국모는 이년이라는 온갖 극딜을 처먹었다. 그리고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는 [[김활란]] 썅년과 함께 이화여전, 숙명여전 출신의 영어 능통자를 뽑아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사교 클럽)을 차리기도 했다. 이때 뽑힌 여성 중에는 [[손원일]] 제독니뮤의 부인 분(홍은혜 씨)도 있었다. 여사니뮤ㅠㅠ 주된 손님은 당연히 미군이었는데 이때 뽑힌 사람들이 했던 일이... 전숙희라는 당시 사교 클럽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던 문인이 저술한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는 거의 빡촌 수준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뉴라이트]] 세력에 의해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외교라고 둔갑당했다. === 말년 === 1971년도에는 [[민주공화당]]에게서 공천 받아서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80년대에는 문화·예술과 관련된 각종 단체에서 이사장으로, 혹은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독재정권의 애널을 후빨한 공로를 제대로 받아 쳐먹었다. 뒈진 지 1년이 지난 1991년에는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 문화의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는 문화훈장을 이 년이 받았다. 가히 헬조선의 국모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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