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독일 사회민주당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역사== ===프로이센~독일 제국=== {{사회주의}} 프로이센, 독일 제국 시절 창설되었으나 1890년 [[비스마르크]]의 퇴임으로 반사회주의법이 폐기되기 전까지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으며, 이름 또한 1890년 이후에야 사회민주당으로 바뀌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혁명을 외치는 강경 좌파가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이 커지면서 더 이상 강경 노선을 취할 순 없는 노릇이였고, 점점 온건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1912년 원내 1당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일어나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을 지지했는데 이는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반대되는 행동이였고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망한다. 이걸 계기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강경 좌파는 독일 공산단으로 떨어져 나갔고 또 기존 반전세력들 또한 독립사회민주당으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 {{사회민주주의}} 그러나 [[독일 제국|제정]]이 [[1차대전|대전쟁으로 인해]] 망하자 이들에게 기회가 온다. [[협상국]]은 제국과의 협상을 거부했고 이에 군부가 사민당에게 처리를 맏긴다. [[제헌]]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사민당이 1등을 하게 되었다. 이때 [[공산당|빨갱이]]들은 떨어져 나가서 폭동하고 있었는데, 베를린에서 또한 폭동이 심하여 바이마르에서 첫 회의를 개회한다. ===프로이센 쿠데타와 나치, 그리고 해산=== {{불쌍}} 대공황으로 극단주의가 떠오르던 1932년, 당시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명목으로 프로이센 주정부를 해산시키고 스스로 주 총리로 취임했다. 고작 주정부 해산한게 뭐 대단한 거냐, 있어봐야 신호탄의 의미 아니냐 싶겠지만 당시 프로이센 주는 대충 봐도 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큰 주였다. 심지어 자치권도 강해서 경찰권 등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 주정부의 경찰력은 꽤 강한 편이였기에<ref>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당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군대 제한으로 인해 군인들이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장교였다. 그래서 경찰들과 준군사조직을 통해 이를 우회했다.</ref> 사민당은 나치가 자기들 무력진압하면 당시 준군사조직 국기단과 프로이센 경찰들을 동원하여 나치에 맞설 생각이였는데 이 계획이 프로이센 쿠데타로 인해 무산된 것이다. 이후 당시 거대 중도우파 정당이던 가톨릭중앙당이 나치의 꼬드김에 속아 [[수권법]]에 동의하고, 공산당은 [[라이히스탁 방화사건]] 때문에 해산당한 상태였다. 결국 사민당만 수권법에 반대하고, 수권법은 통과되어 독일은 나치가 집권한다. ===2차대전 이후=== [[히틀러|낙지왕]]이 발터 PPK로 죽고 낙지가 항복한 뒤 독일은 4개 연합국의 점령지가 된다. 이때 사민당도 복원되며 해외로 망명한 반나치 투쟁자들(대표적으로 독일 네 번째 총리 [[빌리 브란트]])이 독일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련 점령지(이후 [[동독]])에서는 독일 공산당과 사민당이 합당되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라는 공산권 국가의 집권당이 된다. 서독지역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남아있었지만, 처음 세 번째까지는 총리를 한 명도 내보내지 못한다. 그러나 독일은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시절의 권위주의와 군국주의가 많이 남아 있었고, 나치도 쉬쉬하는 분위기지 지금처럼 반성하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심지어 당시 총리가 나치 출신으로 유명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였고, 이때 마침 프랑스에서 시작된 68운동이 독일에도 확산되며 독일에서 본격적인 과거사 청산과 탈권위주의 분위기가 불게 된다. 이때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 사회 분위기가 겹쳐 본격적인 과거사 청산이 시작된다. 이때 당시 공산권이던 폴란드에 가서 무릎꿇기를 시전하는데, 이때 당시 '일시적'으로 '빼앗긴' 영토에 대해 영구적으로 포기를 선언하자 난리가 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결국 [[독일 재통일]]때에 독일이 더 이상 영토 확장의 야욕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반발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동방정책도 시행하는데, 이는 기존 반공노선에서 반공은 유지하되 긴장을 풀고 유화적으로 나서는 정책이였다. 물론 이 정책도 결국 동구권의 개방을 이끌어내는 정책이고, 자국이 피해를 입으면 얄짤없이 항의했다. 누구처럼 퍼주기만 하는 외교정책이 아니였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의 개인 비서이던 귄터 기욤이 간첩이였다는 게 드러났고, 다행히 국가적인 곳에는 손대지 못한 게 드러났으나 귄터 기욤이 빌리 브란트를 입막음하기 위해 창녀들을 공급하고 빌리 브란트가 묵인하던 게 들통나 빌리 브란트는 더 이상 총리를 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같은 사민당 총리이나 조금 더 중도우익에 가까웠던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가 된다. 이후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독일 통일을 이룬 기민련 총리 [[헬무트 콜]](방금 언급한 사민당 총리랑은 다른 총리이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어 당시 독일의 난리난 경제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다.(하르츠 개혁) 그러나 당장 빛을 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지지를 잃어 기민련의 과학자, 동독 출신인 여성 정치인 하나에게 잠깐 정권 넘겨주고 얼마 안 가 다시 돌려받을 생각으로 넘겨줬는데... 하필 그 사람이 [[앙켈라 메르켈]]이였다. 십수 년이 지나, 메르켈 퇴임 이후 다시 사민당 총리인 [[올라프 숄츠]]가 집권한다. [[분류:독일]] [[분류:사회민주주의]] [[분류:정당]]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