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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화 == === 사회기반시설 === [[파일:Namdaemunro ca 1900a.jpg]] 대한제국 시기의 남대문 거리. 1대 황제 광무제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근대화 개혁에 돌입하여,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전기조명회사와 계약해 동아시아 최초로 전기를 한양과 그 번화가에 공급하고<ref> [http://www.ma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01]</ref> 189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이자 한국전력의 시초인 '한성전기'를 설립했다. 사회의 집권 주류층이 나름 책 좀 읽는다고 엣헴 하던 문화가 강하던 한반도국가 답게 대한제국이 금방 좆망해서 욕처먹는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내실쌓기는 잘 했다. 방향성에서 무력증강보단 문치 위주였던게 당시 시대상황에 너무 직빵으로 안맞았던게 흠. 아예 서양화를 하자고 내전하고 정권이 뒤집히고 나서 설치던 일본보다도 전기설비같은 현대문명보급이 빨랐고, 당연히 서양 사치품 문화제품같은것도 수입이 빨랐으며 고종 또한 황제딸을 치기위해서라는 목적은 있었지만 서양식 코스요리를 궁중식사에 도입해서 먹을 만큼 이쪽으론 빨랐다. 집권층인 양반들은 소중화에 빠져서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닫혀서 딸딸이치다가 문화충격을 먹게 된 이 시기의 상황에서, 뭔가 문제의식을 느꼈는지 세계를 공부한다고 1900년전후 당시의 [[국제어]]([[링구아프랑카]])였던 [[영어]](물론 [[영국식 영어]])공부를 존나 단체로 열심히 해댔고 재상들도 외국 외교관과 영어로 문제없이 대화했다고 한다. 나중에 농사 잘 짓던 나라를 일본에 낼름 처먹히니까 열받아서 자살한 아자씨부터 그 유명한 이완용까지 성향을 떠나서 전부. 어찌보면 언어 쪽을 외교부로 선택집중을 한 지금 보다 핵심은 잘함.ㅋ 다만 이렇게 잘 농사지어서 한타 군국주의 딸딸이를 치던 옆동네 일본에게 낼름 다 처먹히고 공짜로 헌납해서 배만 불려 줘서 남 좋은 일만 한 건 정말 ㅄ짓이었지만. === 화폐 === [[파일:2014020702220 0.jpg]]<br> 한국 최초 지폐 호조태환권(10냥). 대한제국 당시 고종 황제가 경제 근대화를 위해 추진한 화폐 개혁 당시 발행했다. 고종 광무제는 근대화를 위해 교육, 의료, 사회 인프라, 언론 등 다방면에서 기초를 닦는데 힘썼고 실제로 그것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유일하게 화폐 경제를 정착시키는데는 사실상 실패했다. 이유는 조선시대 이어져 오던 사농공상 사상의 여파로 상공업이 부진했기 때문인데, 고종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상공업 부흥정책을 강화하여 서북지방(평양, 개경)을 중심으로 상업 유통을 더 강화하여 노력하였다. 1896년 아관망명부터 1904년까지 9년 동안 무려 205개의 회사가 창설됐다. 금융업 11개, 농림업 16개, 제조업 18개, 광업 9개, 상업 67개, 운수업 27개, 수산업 3개, 청부토건업 14개, 기타(인쇄·출판·제약·매약·유흥업·용역업 등) 분야에서 40개였다.(전우용, 『한국 회사의 탄생』 130~137쪽) 대한제국 정부는 호조태환권을 정상적으로 발행하지 못하였고 대체수단으로 백동화를 주조하여 국가의 화폐로 유통시켰으나, 이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여기에 일본이 조선 화폐정리사업까지 대차게 벌이면서 조선의 경제는 쭈욱 나락간다. 은행으로는, 대한천일은행이 있다. === 교육 === [[파일:26711 52680 1029.jpg]] [[이화여대]]의 전신이 되는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모습. 고종은 근대적 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파의 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 개혁과 관립학교를 설립하고<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16022007 </ref> 정동에는 각국의 공사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서양 선교사들에게 신식교육도 적극 허가했다. 또 국민들을 대상으로 [[만민공동회]]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근대사회 수준으로 높이는데 크게 힘썼다. === 교통 === [[파일:The West Gate of Seoul, Korean Empire (대한제국 서대문역).jpg|800픽셀]] 당시 대한제국의 서대문역 모습. [[파일:201509140728354794845 20150914073116 01.jpg]] 한국 최초의 기차인 '모갈 1호'의 모습. [[http://www.egreennews.com/ko-kr/print.php?ud=201509140728354794845_1]] 고종은 근대화 확산산업에 있어 필수인 철도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기차를 보급했는데, 이가 바로 한국 최초의 기차인 '모갈 1호'다. 당시 이 기차의 이름인 "모갈 1호"에서 모갈(Mogul)은 ‘거물’ 또는 ‘거인’의 뜻이었지만 발음이 낯설어 사람들은 모갈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냥 ‘불’을 때서 가는 기차라 하여 <화차> 혹은 <화륜거>라 했다고 한다 . 개통 다음날인 9월 19일 독립신문에 경인선 시승기가 실렸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를 각기 방 한 칸씩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철구로 연결하여 수미상접하게 이었는데, 수레 속은 상중하 3등으로 수장하여 그 안에 배포한 것과 그밖에 치장한 것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노량진을 떠난 모갈1호는 종점인 인천역까지 평균시속 20㎞/h로 33㎞를 달렸으며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정도 였다고 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인 1899년 서울 한성부에 노면전차가 개통하였고 이 시기에 인력거와 자전거도 수입되면서 교통이 크게 발달한다. 교통증가에 따라 정부에서 도로의 폭을 넓히는 도시개조 사업도 별도 추진한다. 대한제국 시기에, 해상교통도 발달한다. 사람들이 하와이 이민을 갈때는 증기선을 타고갔으며 이운사, 대한협동우선회사 같은 해운회사가 설립되었고 창룡호 현익호 조양호 등의 여러 기선을 들여와 여객과 화물수송은 물론, 무역을 할때에도 성능좋은 증기선으로 해외무역을 하였다. === 의료시설 === [[파일:bandicam_2020-10-08_22-04-45-427.jpg]] 세브란스 병원 1880년대부터 조선에 여러 병원이 들어선다. 제중원은 서양의학을 도입한 대표적인 병원이었다. 한말~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사들은 조선에 서양의술을 전파하였으며 대한제국 시기 들어서 서양의학이 크게 꽃피우게 된다. 이제 더이상 한의학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나라의 의학이 발전하고 수명이 점차 높아진다. 1900년대에는 세브란스병원, 대한의원이 개원한다. 이러한 서양의학의 유행은 서울 뿐만이 아닌, 지방에도 영향을 줬다. === 언론 === 독립협회가 발행한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여러 신문사가 있었다. === 군대 === 약했다. 서양식 총포에 올인쳤던 옆 일본하고 비교해도 역량에서 군대에 투자한 비율이 확실히 적었던게 느껴진다. {{약함}} {{참고|대한제국 군대}} [[파일:20080404945142903.jpg]] [[파일:bandicam 2020-10-12 03-09-05-562.jpg]] * 친위대 * 시위대 * 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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