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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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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정 == [[탕셩즈]] 사령관이 역돌격하면서 [[난징]]성이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축복]]이 찾아왔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gg친 짱꼴라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참교육을 수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짱깨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짱깨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예술품이 되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등 수많은 바퀴벌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하여 짱깨산 석유 직화구이로 만들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난징 파티에 참가한 어느 쪽바리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 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중화민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라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쪽바리들은 군인 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 없이 평등하게 짱깨 새끼들을 참교육했다. 이러한 즐거운 '바퀴벌레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따먹고 다음에 조짐)이라는 신개념 먹버를 제시하였으며, 일본군은 춘장 보지년을 먹버 후 바로 쳐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로린이부터 시작해서 60, 70대 노파들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성축복했다.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 짱깨들 상대로 지들끼리만 신나는 파티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 100인 살충 경쟁 === {{참조|100인 참수 경쟁}} [[파일:Contest_To_Cut_Down_100_People.jpg|오른쪽|200px|섬네일|1937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보도 된 100인 참수경쟁 기사.]]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는 일본군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와 [[노다 츠요시]]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하는지 겨룬 일이 보도되었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벌레 참교육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분노한 바퀴벌레 판사들이 원숭이에서 벌레로 퇴화 한 두 쪽바리 새끼들에게 사형을 때려버렸고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와 함께 자신도 살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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